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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시선] 볼턴 회고록과 조기숙의 페이스북

중앙일보 2020.07.02 00:35 종합 28면 지면보기
이정민 논설위원

이정민 논설위원

백악관을 발칵 뒤집어놓은 존 볼턴(전 국가안보 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있었던 방』은 세계 최강 미국의 권좌, 그 깊숙한 곳에서 벌어진 기밀과 비사(祕史)가 담긴 정보의 보고(寶庫)다. 책은 많은 부분을 외교와 국제관계에 무지해 참모들로부터도 조롱받는 트럼프의 좌충우돌과 기행(奇行)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국익을 우선해야 할 외교조차 자신의 재선을 위한 도구로 이용한 추악한 사익 추구 정상외교의 현장을 고발한다.
 

실정 수두룩한데 ‘문프’ 찬양 요란
전체주의로 가는지 의심해봐야
조 교수 글, 토론 여는 마중물되길

트럼프는 당장 전쟁이라도 벌일 듯 으르렁대던 시진핑 주석과 만나 “중국이 콩과 밀 구매를 늘려주면 선거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승리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노골적인 로비전을 폈다. 심지어 시진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위구르족 탄압을 위한 수용소를 “매우 옳은 일이기 때문에 계속해야 한다”는 상식밖의 발언을 했을 정도다.
 
터키 기업인에 대한 미국 검찰의 수사를, 트럼프는 독재자 에르도안과의 뒷거래를 시도할 구실로 여겼다고 볼턴은 쓰고 있다. 이벤트만 풍성했을 뿐 내용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미스터리도 절로 풀린다. 볼턴은 트럼프가 참모들에게 “회담은 보여주기 위한 거다. 알맹이 없는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승리를 선언하고 바로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두 가지 의문이 피어오른다.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였던 이가 이리도 모질게 자신의 보스를 공개적으로 망신주고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볼턴이 “역사가 트럼프 대통령은 한 번의 일탈로 기록하기를 희망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듯이 트럼프의 재선 저지를 분명히 하고 있지 않은가.
 
고작 조국 법무장관 취임에 반대하고 공수처법안에 기권표를 던졌을 뿐인데 국회의원 공천에서 배제되고 징계까지 받는 나라,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꺼내 들자 검찰총장에서 물러나라며 십자포화를 퍼붓는 나라에서 보는 회고록 파문은 그래서 낯설고 몽환적이다.
 
한국이라면 이런 책이 출판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미국 정부는 국가 기밀이 담겼다며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연방 법원은 출판을 허용했다. 다만 법원은 “볼턴이 국가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초래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출판은 인정했지만, 기밀 유출로 인해 국가안보에 위협을 초래했는가는 별도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취지다.
 
막고 겁주고 윽박지르기보다 토론과 법리 논쟁을 통해 흑백을 가리려는 합리적 이성이 부럽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인 청년이 건조물 침입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 대학 관계자가 재판에서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이 문제가 재판까지 가야 할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진술했는데도 법원은 50만원의 벌금을 때렸다. 대북 전단을 살포하면 붙잡혀가고, 곧 광주 5·18의 역사를 다르게 왜곡하면 처벌받는 법이 통과될 참이다. 우리의 처지가 더 남루해 보이는 이유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것, 그래서 전체를 마치 하나의 개인인 것처럼 구조화하는 것이 전체주의다.
 
민주당 싹쓸이의 국회 원구성과 독주, 공론화 없이 밀어붙인 자사고·특목고의 일반고 전환, 부동산 투기 잡겠다며 되레 집값만 더 올려놓은 부동산 실책, 파탄 난 대북 정책…곳곳이 이렇게 망가지고 곪아 터져도 ‘문프(문재인 대통령)는 항상 옳다’는 주문과 충성 다짐만 요란하다면 전체주의로 가는 길목에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헌정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여당 독식·독주사태를 나무라거나 자성을 촉구하는 정치 원로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주장과 토론조차 사라져버린 이 고요와 적막감의 실체는 무엇인가.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반역자’라는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의 분투가 외롭다. 노무현 정부에서 홍보수석을 지낸 조 교수는 “문 대통령이 일본과 같이 우리도 집값이 폭락할 테니 집 사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고 한다. 참모로부터 잘못된 신화를 학습했다” “대책을 내놔도 먹히지 않으면 다양한 의견을 청취해 정책 변화를 가져오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라고 지적했다. 친문 성향의 사이버 부대들은 조 교수의 조상까지 들먹이며 저주에 가까운 댓글 테러를 퍼붓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대중이 똑같은 의견을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똑같이 행동할 때 그들은 전체주의의 폭도가 된다”고 경고했다. 의미심장하다. 전체주의로의 폭주를 막으려면 토론을 허용해야 한다. 조 교수의 페북 글이 토론을 여는 마중물이 되길 기대한다.
 
이정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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