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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전] 노점상

중앙일보 2020.07.01 00:16 종합 31면 지면보기
정철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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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직장은 길바닥.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 퇴근길에 그를 만나면 걸음 멈추고 한마디만 건네주시길. 나물 한 봉지 담아주세요. 군밤 열 개만 싸주세요. 이 한마디가 그에겐 이렇게 들린다. 그대도 일찍 퇴근하세요.
 
『사람사전』은 ‘노점상’을 이렇게 풀었다. 나는 그를 모른다. 그도 나를 모른다. 걸음을 멈출 이유가 없다. 스쳐 지나가면 된다. 남이니까. 바쁜 퇴근길이니까. 내 가족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나는 그를 휙 스쳐 지나간다. 내 뒷사람도 그를 스쳐 지나간다. 그 뒷사람도 그를 스쳐 지나간다. 다음 사람도 그를 스쳐 지나간다. 다음다음 사람도 그를 스쳐 지나간다. 그는 퇴근할 수 없다. 집에 갈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를 스쳐 퇴근하는 사람의 뒷모습이 눈에서 멀어질 때까지, 그는 에어컨도 없는 직장에 앉아 있어야 한다. 열대야 견디며. 왕모기 쫓으며. 벌컥 벌컥 미세먼지 마시며.
 
화면을 거꾸로 돌린다. 그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뒷걸음으로 다시 노점상 앞으로 온다. 거기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갑을 연다. 나도 한 봉지. 내 뒷사람도 한 봉지. 그 뒷사람도 한 봉지. 나물 한 봉지가 그의 퇴근 시간을 바꾼다. 군밤 한 봉지가 퇴근하는 그의 손에 돼지목살 한 근을 들려준다.
 
그런데 우리가 담아간 건 정말 나물 한 봉지였을까.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건네는 배려 한 봉지였을까. 아니다. 그건 행복 한 봉지다. 우리는 행복해지는 법을 안다. 아는데, 잘 알고 있는데 자꾸 행복을 휙 스쳐 지나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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