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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 정상으로, 설바우두에서 설딩크로

중앙일보 2020.07.01 00:03 경제 7면 지면보기
초보 사령탑 설기현 경남FC 감독이 유럽식 선수 관리 시스템과 소통의 리더십을 선보이고 있다. 올 시즌 목표는 1부 승격이다. [중앙포토]

초보 사령탑 설기현 경남FC 감독이 유럽식 선수 관리 시스템과 소통의 리더십을 선보이고 있다. 올 시즌 목표는 1부 승격이다. [중앙포토]

“잘 해줘서 고맙다. 만족스럽다.”
 

2부리그 경남 사령탑 맡아 돌풍
9경기서 1패, 승격권까지 넘봐
유럽식 프로 의식과 소통 강조

5월17일 프로축구 K리그2 원정경기에서 서울 이랜드FC와 2-2로 비긴 뒤, 설기현(41) 경남FC 감독은 선수들을 칭찬했다. 개막 후 2경기 연속 무승부였지만, 그는 ‘잘 안 풀렸던 점’보다 ‘잘했던 부분’을 부각했다. 이날 경기에서는 빌드업과 이에 따른 공격이 좋아진 부분이었다.
 
이튿날 훈련장에 나온 선수들은 눈빛부터 달랐다. 실전처럼 슬라이딩하고, 거친 몸싸움을 펼쳤다. 감독의 신뢰에 보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다음 경기(5월24일)에서 경남은 지난 시즌 3위 FC안양을 3-2로 이겼다. 설 감독의 프로 감독 데뷔승이다. 초보 감독 설기현의 리더십이 조금씩 효과를 발휘했다. 경남은 이 경기 등 7경기에서 딱 한 번만 졌다. 시즌 3승5무1패(FA컵 포함)다.
 
상대에 따라 변하는 설기현식 ‘맞춤 축구’가 호평을 받고 있다. 경남의 상승세는 지난달 28일 우승 후보 제주 유나이티드전(1-1무)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한 발 더 뛰는 축구로 끝까지 물고 늘어진 경남이 원정에서 제주의 5연승을 저지했다. 지난 시즌 K리그1에서 강등된 경남(승점 11)은 현재 선두 수원FC(승점 15)와 승점 차를 4로 좁혔다. 본격적인 승격 경쟁에 나섰다. 최근 경남 함안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설 감독은 “시즌을 준비하며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프로 감독 신고식을 혹독하게 했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반면 선수들 경기력은 꾸준히 좋아져 칭찬할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설 감독은 200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장신(1m87㎝) 윙어였다. 힘을 앞세운 돌파에 왼발슛 능력까지 탁월했다. 팬들은 브라질 공격수 히바우두에 빗대 ‘설바우두’로 불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후반에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렸다. 2015년 은퇴 후 성균관대 감독을 거쳐 이번에 경남을 맡았다.
 
유럽파 출신인 설 감독은 선수들에게 ‘프로 의식’을 전파했다. 그는 “웨이트 트레이닝은 따로 시키지 않는다. 프로라면 체력과 힘은 각자 시간을 내 따로 만드는 거다. 유럽에선 다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합숙도 없다. 경기 당일 각자 경기장으로 출근한다. 국내에선 파격적인 선수단 운영이다. 그는 “편한 집을 놔두고 숙소 생활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경기에 나서는 게 오히려 낫다. 유럽에서 뛰던 시절 아내를 보면 ‘한 골 넣어야지’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소통을 중시한다. 설 감독은 최근 축구 예능 프로그램 ‘뭉쳐야 찬다’에 출연했다. 페널티킥을 실축해 자존심을 구겼다. 그는 “방송 다음 날 선수들이 날 보면 키득대더라. 감독 권위 같은 건 내려놨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페널티킥은 자신감이다. 나처럼 하면 안 된다’고 얘기했다”고 소개했다. 요령 피우는 선수에게는 가차 없이 쓴소리를 한다. 그는 2002년 월드컵 당시 스승이던 거스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히딩크 감독은 세련된 리더십으로 선수단을 장악했다. ‘밀당’(밀고 당기기)의 고수였다. 선수들을 어떻게 하면 더 동기 부여가 되고 더 잘 뛰게 될지 잘 알고, 자극을 줬다”고 떠올렸다.
 
설 감독은 자신의 축구 인생처럼 밑바닥에서 정상에 오르는 꿈을 꾼다. 광운대 재학 중이던 2000년 벨기에로 건너간 그는 앤트워프(2000~01년), 안더레흐트(2001~04년)에서 뛰었다. 이어 당시 잉글랜드 챔피언십(2부) 팀이던 울버햄튼(2004~06년)을 거쳐 2006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레딩에 입성했다. 그는 “내 축구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늘 살아남았고, 높은 데 오르는 법을 안다”고 강조했다. 이어 “경남은 나와 닮았다. 팀워크만으로도 재미있고 압도적인 축구를 하는 게 목표다. 목표인 1부 승격을 잊은 적이 없다. 설기현식 팀워크 축구가 자리 잡으면 결과도 따라올 것”이라고 말했다. 표정에서도 자신감이 넘쳤다.
 
함안=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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