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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AI급 경지의 예술적 명국, 신진서 날다

중앙일보 2020.07.01 00:03 경제 7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저쪽 중국대륙에는 커제(23) 9단 등 강자들이 우글거린다. 이창호 시대의 영광을 기억하는 바둑팬들은 염원했다. 이들을 필마단기로 돌파할 새 강자는 언제 나타날 것인가. 박정환(27) 9단은 1% 부족하고 신진서(20) 9단은 아직은 덜 컸다고 팬들은 생각해 왔다. 아쉬움이 남았고 갈증이 느껴졌다. 중국을 이기기는 힘들다는 분위기가 점차 심화됐다.
 

박정환 이기고 “실력 향상된 느낌”
필마단기로 중국 강자 격파 기대감

6월 23일, 무언가 판도를 바꿀만한 바둑 한판이 두어졌다. 작은 무대였지만 2000년생인 신진서가 기록에 남을만한 ‘명국’을 선보이며 박정환을 꺾었다. 바둑채널 K바둑이 생중계한 쏘팔코사놀 최고기사결정전 결승 3국. 신진서는 3대0 완봉승을 거두며 우승컵을 차지했다. 랭킹 1위가 2위를 꺾었다는 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주목할 부분은 내용이다. 신진서가 보여준 바둑은 예술적 감흥을 자아낼 만큼 훌륭했다. 제아무리 커제라도 이런 신진서를 꺾기는 힘들 것이다. 바둑 한판으로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겠지만 그런 느낌이 저절로 드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잠룡’으로 불리던 신진서, 그가 만20세가 되어 드디어 형체를 드러낸 것인가.
 
바둑이 끝나고 신진서는 “내 실력이 향상된 느낌이다”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8년 전 프로가 된 이래 겸손 모드로 일관하던 소년 신진서에게선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이 판에서 박정환도 심혈을 기울여 멋진 수들을 만들어냈다. 역설적으로 박정환이 최고 기량을 보여줬기에 신진서가 승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더욱 빛났다. 선배 박정환은 담담하지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깨달음이 있었고…배움이 있었다.”
 
○·박정환 9단 ●·신진서 9단 백1로 좌하 사활은 패. 무려 80집짜리임에도 신진서는 이를 포기하고 2,4로 변신, 혼란을 잠재우고 승세를 잡았다. AI가 제시한 최선의 그림이었는데 신진서가 정확히 짚어냈다.

○·박정환 9단 ●·신진서 9단 백1로 좌하 사활은 패. 무려 80집짜리임에도 신진서는 이를 포기하고 2,4로 변신, 혼란을 잠재우고 승세를 잡았다. AI가 제시한 최선의 그림이었는데 신진서가 정확히 짚어냈다.

한국바둑의 미래가 밝게 느껴지는, 여운이 남는 종국 풍경이었다.
 
신진서는 3대0 승리에도 불구하고 박정환에게 9승 16패로 크게 밀린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져왔나 잘 보여준다. 또 중국 일인자 커제에게는 3승 8패로 더 크게 밀린다. 박정환이 커제에게 13승 11패로 앞서는 것에 비하면 대차다. 신진서가 세계대회에서 부진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하지만 24일의 바둑에서 신진서는 자신의 바둑이 전환점에 다다랐음을 보여줬다. 포석, 수읽기, 형세판단, 균형감 등 모든 면에서 그간의 아쉬움을 씻어버렸다.
 
김지석 9단은 “내가 AI 이전 세대라면 박정환은 중간, 신진서는 AI세대다”고 말한다.
 
신진서는 AI를 통해 바둑의 새로운 경지를 접했고 AI를 통해 공부하면서 나날이 AI를 닮아가고 있다. AI가 신진서의 재능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빨리 코로나가 끝나 새롭게 궤도에 오른 신진서가 세계무대에서 질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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