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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탈북자’ 그 소리에 피가 맺히네

중앙일보 2020.06.30 00:19 종합 28면 지면보기
유자효 시인

유자효 시인

고등학생 때쯤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어릴 적 친구가 오셨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어머니의 친구를 뵌 적이 없었습니다. 제 기억 속의 어머니는 늘 몸빼 차림으로 바쁘게 일하시던 모습입니다. 일제 말 정신대 차출이 심해지자 딸 가진 부모들은 혼사를 서둘렀다고 하지요. 열일곱 살에 제 아버지께 시집온 어머니는 여섯 자식을 거푸 낳으시며 사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그분이 들려준 말입니다. “네 엄마는 노래를 참 잘한다.”
 

탈북민에게 한국은 마지막 희망
우리에게 탈북민은 먼저 온 통일
북한 위협에서 그들 지켜내야

그 말도 저로서는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노래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어머니의 친구분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부산에서 노래자랑 대회가 열렸는데, 열 살 남짓이던 어머니가 나가서 1등을 했다는 것입니다. 상을 주러 나온 당대 최고의 가수 고복수 선생이 어린 어머니를 안아 올리며 “너는 자라서 가수가 되어라”고 말씀하셨답니다. ‘타향살이’의 스타 고복수 선생의 그 한 마디는 숱한 역경 속에서도 어머니를 지켜준 훈장과도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야기는 다 꾸민 말이야. 그러나 노래에는 거짓이 없지.” 살아보니 어머니의 말씀은 사실이었습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도 봤다/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이느냐/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굳세어라 금순아’)
 
6·25 전쟁 때의 부산은 전국의 피난민들을 품에 안아 먹여 살린 곳이었습니다. 피난의 혼란 중에 ‘헤어지게 되면 부산 영도 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가족이 많았다지요. 영도 다리에는 혹시 가족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하여 배회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고, 생활고를 못 이겨 치마를 둘러쓰고 바다로 뛰어드는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다리 아래에는 점집이 즐비했었고 눈물을 닦으며 나오는 사람들이 황황히 사라지곤 했었지요.
 
옛 부산역 앞에서 청과물 회사를 하던 아버지는 피난민들을 집으로 받았습니다. 새댁이었던 어머니는 그들 치다꺼리에 무척 바빴겠지요. 그러나 휴전을 하던 해, 부산역전 대화재로 우리 집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전국의 피난민들이 몰려든 부산에서는 그 난리 통에도 갖가지 연애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피난살이 처량스러 동정하는 판잣집에/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 우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경상도 아가씨’)
 
저의 집은 이 40계단 아래 있었습니다. 지금은 6·25 당시의 추억 공간으로 조성돼 있더군요. 참으로 살기 어려웠던 시절,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듣고 부르며 마음의 위안을 찾았습니다. 대중가요의 힘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6·25 때 보여준 대중가요의 응전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우리의 K 트로트가 프랑스의 샹송처럼, 이태리의 칸초네처럼, 포르투갈의 파두처럼 세계 속으로 뻗어나가기 바랍니다.
 
저는 출판사로부터 시집 해설을 의뢰받았습니다.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있는 여성이 쓴 시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들의 내용이 너무나 참혹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초가 생생하게 기록돼 있었습니다.
 
탈북민들에게 한국은 마지막 희망입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먼저 온 통일’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본 진실을 북녘 동포들에게 알리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정보를 담은 풍선을 날려 보내거나 쌀을 담은 페트병을 띄워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북한 당국은 이를 대남 협박의 빌미로 삼고, 우리 돈으로 지은 개성 남북 연락사무소를 폭파해버렸습니다. 탈북민들은 목숨 걸고 찾아온 자유의 땅에서 북으로 전단을 보내는 것이 불법 행위라며 경찰의 제지를 받는 현실도 겪었습니다. 대한민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지상의 가치인 인권과 자유를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싸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70년 전 6·25 그때,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그리고 탈북민들을 북의 위협에서 보호해야 합니다. 자신의 거처 앞에서 남파 공작원에게 암살된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 씨 같은 경우가 다시는 있어선 안됩니다. 집으로 찾아온 취재 기자에 대한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의 지나친 폭력적 행위에는 이런 공포감이 내재되어 있지 않았을까요? 저에게는 고향을 떠나온 3만5000 탈북민들의 소리가 들려 옵니다. “탈북자, 탈북자, 그러지 마소. 탈북자 그 소리에 피가 맺히네.”
 
유자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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