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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6월 수상작

중앙일보 2020.06.30 00:03 종합 18면 지면보기

〈장원〉

순천만
-유혜영
 
바람의 모서리를 견디는 중인데도
꼿꼿이 일필휘지 필법을 생각한다
온몸이 붓이 되었으니  
필체가 웅장하다
 
밀물과 썰물이 조석으로 읽고 가며
오밀조밀 새긴 문장 짠 내가 풍부하다
뻘밭을 꼭 찍어 맛보는  
왜가리는 쉼표인가 
 
한순간 철새 떼가 갈대를 필사한다
이곳의 진경을 저곳으로 옮긴다
이 세상 가장 거룩한 습지  
황홀경이 살고 있다
 
◆유혜영
유혜영

유혜영

경기도 이천시 출생. 2001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풀잎처럼 나는』 『치마, 비폭력을 꿈꾸다』 등 출간. 박종화 문학상 수상.

 
 
 
 
 

〈차상〉

하루
-류용곤 
 
손가락 한 마디가 달 속으로 사라지고  
또다시 올라오는 동쪽 하늘 아린 새벽  
몇 번을 잘려 나가야 통증 없이 살아날까. 
 

〈차하〉

소방일기日記
-남궁증
 
1
너희는 날기 위해 꿈자리를 비운다지
방수화에 방화복 구두 대신 올려놓고
천 번의 눈 맞춤 끝에 새매*되어 난다더군 
 
2
뼈를 훑는 사이렌 긴 물줄기 거머쥐면
불길 속 컵라면 한 끼, 면발 잘린 산소통
몇 초의 생수병처럼  
물을 쫓아 뒹구는 헬멧
 
3
이런 밤이면 생각나요  
어머니의 붉은 밥상
침상 끝을 써 내려간 처음인 듯 마지막의
그 문장 날개를 달고 눈시울을 나는구나!
  
※새매 : 용맹을 상징하는 소방공무원의 표지장이다. 지난 10년간 54명의 소방관이 순직하였다.
  

〈이달의 심사평〉

6월, 신록이 눈부신 달. 이달의 당선작들을 올린다. 장원은 유혜영씨의 ‘순천만’이다. 화자는 장엄한 순천만의 풍경을 진경산수화를 그리듯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비유도 뛰어나고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등 다양한 심상을 활용한 시적 기법도 탁월하다. 시조가 가져야하는 제시, 전환과 확장, 종결의 미학도 잘 살렸다. 그러나 둘째 수 중장 ‘풍부하다’라는 형용사가 걸린다. 모든 어휘는 시어가 될 수 있지만 어떤 언어는 시어가 될 수 없다는 모순성 때문이다.
 
차상은 류용곤씨의 ‘하루’다. 삶의 고단함이 잘 갈무리되어 있다. 초장의 ‘손가락 한 마디가 달 속으로 사라지고’는 강렬하다. 험난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하고, 하루를 손가락 마디 하나가 잘리는 것이라는 말로도 읽힐 수 있는 중의적 표현이라 더욱 그렇다.  
 
차하는 남궁증씨의 ‘소방일기’다. 다른 사람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지옥과도 같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소방관의 이야기다. 1장은 화자가 일기의 주인공인 소방관을 대하는 자세, 2, 3장은 제목대로 어느 소방관의 일기다. 이를 통해 그들이 마주하는 현실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급박한가를 잘 보여주었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 앞에 고개 숙이게 하였다. 오대환, 이미순, 서희정씨의 작품도 주목해서 읽었다.
 
심사위원 : 김삼환, 강현덕 (심사평 : 강현덕)
 

〈초대시조〉

기원
-하순희
 
미안했다 잘못했다 부디 용서해라
잘 할 거라 잘 지낼 거라 그냥 그리 생각했다
어쩌면 떨쳐버리고 생각하기 싫었다
 
떠다니는 바람처럼 온 우주 떠돌다가
어느 하늘 어느 땅에 비가 되어 내리면
너 떠난 나무 아래서 새움이 돋을 게다
 
◆하순희
하순희

하순희

경남 산청 출생. 1991년 경남신문, 9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조집  『별 하나를 기다리며』 『종가의 불빛』  등.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수상.

 
 
 
 
하순희 시인의 시조에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진정 어린 사랑이 가슴 뭉클하게 포착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시집을 읽다 보면 막무가내 창자가 짠해 오는 작품이 많다. 게다가 하 시인의 작품들은 대부분 허구와 상상의 소산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경험적 현실을 시적 소재로 삼고 있다.  
 
위의 작품도 같은 맥락 위에 서 있다. 보다시피 화자는 특정 인물인 ‘너’라는 사람에게 “미안했다 잘못했다”라고 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있다. 당연히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야 마땅할 텐데, 막상 그렇게 하지 못한 데 대한 때늦은 후회와 진솔한 자기반성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이에 ‘너’에게 무슨 큰일이 나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잘 할 거라 잘 지낼 거라 그냥 그리 생각했다”는 표현에서 ‘너’라는 사람이 막상 잘 지내지 못했음이 은연중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너’라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그 ‘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게다. 왜냐하면 ‘너’는 “떠다니는 바람처럼 온 우주를 떠도는” 존재이니까. 그러니까 이 시는 한 사람의 난데없는 죽음 앞에 바치는 뼈아픈 참회록인 동시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위무하는 진혼곡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작품이 마냥 깊은 슬픔의 수렁 속에 빠져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영혼이 온 우주를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하늘 어느 땅에 비가 되어 내리면”, 그가 떠난 나무 아래서 ‘새움’이 돋아 날 터이기 때문이다. 사자의 영혼을 위무하기 위한 진혼곡이 생명의 부활을 기원하는 희망의 종소리로 승화되어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순간이다.
 
이종문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또는 e메일(choi.jeongeun@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응모 편수에 제한 없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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