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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볼턴까지 '독한 입' 난타전…샌드위치된 文정부 '한반도 운전자론'

중앙일보 2020.06.23 18:04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 집 앞마당에서 남북공동선언인 '판문점 선언' 을 발표하기 위해 연단으로 향하고 있다. [공동취재단]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 집 앞마당에서 남북공동선언인 '판문점 선언' 을 발표하기 위해 연단으로 향하고 있다. [공동취재단]

 
“미련한 주문을 한두 번도 아니고 연설 때마다 제정신 없이 외워대고 있는 것은 정신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 17일 담화)
“영변 핵 시설 폐기는 문재인 대통령의 조현병적 아이디어”(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좌관, 23일『그 일이 있었던 방: 백악관 회고록』)
 
북한이 연일 대남 공세 수위를 높여가는 가운데 볼턴 전 백악관 NSC 보좌관의 회고록 파문까지 겹치며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였던 ‘한반도 운전자론’이 이중고를 겪고 있다. 한반도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가겠다는 문 정부 의도와는 달리 북한과 미국 양쪽에서 비판을 받으며 책임론까지 제기되는 모양새다. 
 
문 대통령이 '베를린 구상(2017년 7월)'으로 띄운 운전자론은 이듬해 2월 평창 동계올림픽에 김여정 당 제1부부장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고위급 인사가 참석하며 급물살을 탔다. 이어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과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남북 관계는 물론 북한의 비핵화에 진전이 이뤄질 것이란 기대감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한국 정부의 ‘중재자 역할’에 우려 섞인 목소리가 외교가에서 나왔다. 한국이 북한과 미국의 정확한 의중을 전달하지 않으면 “우리가 북한에 속았거나, 우리가 미국을 속였거나, 그것도 아니면 최악의 경우 양쪽에서 결렬의 책임을 우리에게 물을 것”(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이라는 조언이 대표적이다. 이 무렵 미 정부 내에서 “한국이 왜 중재자냐”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오면서 정부는 ‘중재자’ 대신 ‘촉진자’라는 용어로 말을 바꿨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3일(현지시간) 발간한 회고록에서 한국 정부를 맹비난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3일(현지시간) 발간한 회고록에서 한국 정부를 맹비난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실제 지난해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장기간 협상 교착 상태가 이어지자, “양쪽에서 책임론이 제기될 것”이란 우려는 일정 부분 현실이 됐다. 
 
김정은 위원장은 그해 4월 12일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남조선 당국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제정신을 가지고 (미국에 대해) 자신이 할 소리는 하는 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김여정 제1부부장은 이달 연쇄 담화에서 “문 대통령이 남북 관계 교착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고 있다”, “과거 그토록 입에 자주 올리던 ‘운전자론’이 무색해지는 변명”이라고 한 것은 문 대통령을 직접 겨냥했다는 점에서 수위가 더욱 높아졌다. 이어 북한은 남매의 공언을 개성 남북연락공동사무소 폭파(16일), 삐라 제작 공개(20일), 확성기 설치 움직임(22일) 등 ‘도발 행동’으로 옮겨가고 있다.
 
23일(현지시간) 출간된 볼턴 전 보좌관 회고록도 김정은·여정 남매 못지않게 독설로 채워졌다. 볼턴 전 보좌관은 2018~2019년 북·미 협상의 전 과정을 백악관에서 지켜본 인물이다. 볼턴은 북·미, 남북 간 연쇄 정상회담을 알맹이는 없는 “사진 찍기를 위한 홍보성 행사”로 단정했다.
 
물론 볼턴 전 보좌관이 때론 비핵화 협상의 핵심에서 비켜나 있었고, 특정 시각에 매몰됐다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한국이 북·미 사이에서 ‘정직한 전달자’ 내지는 '촉진자'로 역할을 했는지는 되짚을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이달 들어 연쇄 담화를 내고 한국 정부에 대한 강한 불만과 함께 구체적인 실행조치를 지시했다. [중앙포토]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이달 들어 연쇄 담화를 내고 한국 정부에 대한 강한 불만과 함께 구체적인 실행조치를 지시했다. [중앙포토]

 
나아가 한국 정부의 의지는 높이 살 만하지만, 주어진 여건이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냉정히 보면 북한은 2017년 수소폭탄 실험과 여섯 번째 핵 실험으로 위기를 고조시킨 뒤 이를 바탕으로 평화 공세(peace offensive)로 전략을 수정한 것이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를 수락한 것”이라며 “온전히 한국의 중재 외교의 성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2년간의 흐름이 ‘문 정부의 이니셔티브’라기보다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트럼프 이니셔티브’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남·북·미 외교 전략에 대한 대수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6월 30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자유의 집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6월 30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자유의 집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북측이 거부한 남북 간 대화에 계속 매달리는 모양새는 한국의 레버리지를 약화시킨다”며 “북·미 간 대화는 여전히 살아있는 만큼 북·미→남북으로 모멘텀을 살리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조언했다. 위 전 본부장은 "미국이 대선을 앞두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도 수세에 몰려 있는 만큼 실무선에서 협상이 재개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며 “아주 작은 공간이라도 한국이 살려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다영 기자 kim.d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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