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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추억을 붙여왔던 걸까, 엄마와 냉장고 자석

중앙일보 2020.06.23 10:00

[더,오래]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5)

5학년이 되던 해 어머니는 다시 회사에 나가셨다. 그때가 1994년이니까 벌써 26년 전 일이다. 북에서는 김일성이 사망했고, 남에서는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발생한 해이다. 뒤숭숭하고 흉흉한 소문이 돌던 때였다. 더군다나 맞벌이 부부가 흔하던 시절도 아니었다. 5학년 아이가 혼자서 밥을 차려 먹는 게 걱정스러웠는지 어머니는 항상 냉장고 문 앞에 자석으로 메모를 남겨 놓고 출근하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메모를 따라서 혼자 씩씩하게 식사를 차리곤 했다.
 
메모를 읽으면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내게는 어머니의 음식과 손맛, 메모까지도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다. 바쁜 와중에도 반찬을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기만 하면 됐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밥도 차려 먹고 설거지까지 해서, 일에 지쳐서 돌아온 어머니께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다. 어린 내 눈에도 일터에 나간 어머니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 같다.
 
냉장고에 붙여둔 어머니의 메모. "가운데 칸에서 반찬들 꺼내고, 국은 레인지에 2분30초 데워서 먹어...사랑한다, 아들!" [사진 심효윤]

냉장고에 붙여둔 어머니의 메모. "가운데 칸에서 반찬들 꺼내고, 국은 레인지에 2분30초 데워서 먹어...사랑한다, 아들!" [사진 심효윤]

 
한 번은 글짓기 대회에서 ‘일하는 여성은 아름답다’라는 제목의 수필로 상을 받았던 적이 있다.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일하러 나가는 어머니 모습이 멋있다고 썼던 것 같다. 마침 선생님도 같은 여성이었기에 내 글을 칭찬하셨던 것 같다. 선생님의 칭찬 덕분이랄까, 지금까지도 글 쓰는 게 좋다.
 
부엌이 외로웠던 공간만은 아니었다. 주말에는 충분한 보상이 주어졌다. 식탁은 어머니의 사랑이 듬뿍 담긴 음식들로 가득 찼고, 주말 만큼은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식사했다. 식구(食口)의 뜻은 문자 그대로 한집에 살면서 함께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가족이라도 밥을 같이 먹어야 식구가 된다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돌이켜보면 냉장고는 내게 부엌에 있는 가전제품 그 이상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전달하는 메모판이었다. 메모를 남기면 어머니도 안심이 됐겠지만, 나도 메모에서 위안을 받았다. 성인이 된 뒤로 결혼도 하고 분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메모판의 존재는 잃어버렸다. 어머니께서 남긴 수많은 메모 역시 기억 한편에 묻은 지 오래다. 어느 날 문득 홀로 사시는 어머니 댁 냉장고를 쳐다봤는데, 냉장고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메모판은 이제 사라지고 온갖 종류의 자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부부동반으로 다녀온 동남아시아 여행 기념품, 가족과 호주에서 샀던 자석, 환갑 기념 유럽여행에서 샀던 자석, 내가 출장 다녀오면서 드렸던 기념품까지 마치 세계지도를 보는 것처럼 화려한 자석들이 수를 놓고 있었다. 이건 무슨 자석이냐고 여쭤보면, 어머니는 언제 누구와 함께 갔던 여행이고 그때 사진도 찾아서 보여주면서 이야기 꽃을 피우셨다.
 
“어머, 기억 안 나니? 이건 크리스티나가 선물로 줬던 건데 넌 어떻게 그걸 까먹을 수 있어?!”
 
냉장고 자석. [사진 심효윤]

냉장고 자석. [사진 심효윤]

 
크리스티나는 나의 대학 시절, 우리 집에 두 달간 홈스테이로 머물었던 헝가리 친구다. 아들만 키우던 어머니에게 딸이 생겨서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어떻게 그 소중한 추억을 잊었냐며 핀잔을 주셨다.
 
우리 집 냉장고를 추억의 지도로 바꿔준 냉장고 자석은 흥미롭게도 가정용 냉장고가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1920년대보다 이미 반세기 전에 만들어졌다. 시대를 앞선 시도였다. 최초의 냉장고 자석은 영국에서 처음으로 파운드 샵(Pound Shop, 지금의 다이소와 같은 개념의 상점. 다만, 각자가 원조라고 하는 세상이라 의심해볼 법하다.) 사업을 시도한 이매뉴얼 시베로프스키(Emmanuel Shiverofski)와 윌리엄 글래드스톤 블런트(William Gladstone Blunt)의 작품이다.*
 
이 둘의 인연은 대를 이을 정도로 깊었다. 1871년 이매뉴얼은 배를 타다가 큰 사고를 당했는데, 리버풀 해안에서 배가 빙산에 충돌해서 좌초된 것이다. 당시 윌리엄의 아버지인 이점바드(Isambard Kingdom Blunt)가 그를 구출하면서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매뉴얼은 이점바드의 아들인 윌리엄과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고,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그들은 함께 사업을 하게 되었다. 야심 차게 ‘파운드 샵’이라는 아이디어로 사업을 꾸렸지만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1870년대의 1파운드는 현재의 480파운드의 가치에 달해서 상점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실패의 쓴맛을 본 그들은 미래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스톡포트(Stockport)로 여행을 떠났다. 체셔(Cheshire) 지역의 한 펍에서 자석을 이용하는 상품을 구상했다. 하지만 그들의 아이템은 날개를 활짝 펼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매뉴얼은 결국 미국으로 돌아갔고, 윌리엄은 그 뒤로도 냉장고 자석을 값싼 장신구로 전환하는 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미국에서는 냉장고 자석을 말하면 샘 하드캐슬(Sam Hardcastle)과 윌리엄 짐머맨(William Zimmerman)이 선구자로 손꼽힌다. 1960년대 후반, 샘은 우주산업 분야의 트레킹 차트에 쓰일 숫자와 영문자를 자석으로 붙일 수 있도록 제품을 의뢰받았다. 샘은 자석에 색깔을 입히는 걸 비롯해서 다양한 기술을 개발했고, 자석이 상품 광고에도 적합하리라는 점을 간파해서 기업광고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여행 기념품과 관광산업이라는 새로운 시장에도 진출했다. 반면에 윌리엄은 1970년대 냉장고 자석으로 최초의 특허를 받았다. 특히, 냉장고 자석에 만화를 그려 넣는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냉장고와 자석은 천생연분이자 환상의 파트너이다. 자석은 추억을 저장고에 붙이는 셈이다. [사진 Flickr]

냉장고와 자석은 천생연분이자 환상의 파트너이다. 자석은 추억을 저장고에 붙이는 셈이다. [사진 Flickr]

 
기발한 아이디어 제공자들은 냉장고 자석이 이렇게 오랫동안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짐작이나 했을까. 기업의 각종 판촉물 광고뿐 아니라, 관광지에 가면 누구나 찾는 기념품으로 만들어지고, 때로는 집을 꾸미는 홈데코용 장식물로 쓰거나, 수집하려는 취미까지 다양하게 사랑받고 있다. 냉장고 자석을 무려 1만 9300개(1997년 기네스북 등재됨. 현재는 그 수가 4만 5000여 개에 달한다고 함)나 모은 열광적인 수집가가 생길 정도이다.
 
냉장고와 자석은 마치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를 보는 것 같다고 할까. 천생연분이자 환상의 파트너이다. 음식이 미각을 통해서 추억을 남긴다면, 자석은 추억을 저장고에 붙이는 셈이다. 우리는 어떠한 맛을 느끼면서 어느 순간 자신의 과거로 돌아간다. 그리운 맛을 만들어주던 사람이나 그 음식을 함께 나눈 사람을 기억한다. 마찬가지로 냉장고에 자석을 붙이면서 과거를 추억한다. 여행지에서 함께 나눈 사랑이나 돈독하게 맺은 우정과 같은 아름다운 관계를 되새기게 된다. 냉장고 자석은 추억에 관한 공통분모를 활용한 좋은 아이템인 셈이다.
 
저마다 냉장고와 추억에 얽힌 이야기는 다양할 것이다. 내게는 메모의 이야기가 있지만, 누군가는 여행 에피소드가 떠오를 것이고, 누군가는 친정어머니가 때마다 보내주시는 김장김치가, 시골에서 보내준 신선한 식재료가, 혹은 냉장고를 열어 볼 때마다 빽빽하게 채워져 있던 까만 봉투가 떠오를 수 있겠다. 그렇게 냉장고는 추억 저장고가 된다.
 
* Ripley, Derek J. Forgotten Lancashire and Parts of Cheshire & the Wirral, Liverpool: TMB Books, 2012.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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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효윤 심효윤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필진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 아시아 지역의 곳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에서 그들의 삶과 문화를 관찰한다. 부엌과 음식문화를 연구하는 <냉장고 프로젝트>와 전통지식 및 무형문화유산을 기록하는 <위대한 유산 아시아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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