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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100개 압박에 퇴사 고민" 은행원이 말하는 은행원 비애

중앙일보 2020.06.23 09:00
평균 연봉 9600만원에 아이 한명에 2년 육아 휴직을 보장하는 직장. 예나 지금이나 취업준비생에게 은행은 최고 직장이다. 하지만 은행원들은 “점점 팍팍해진다”고 입을 모은다. 무섭게 성장 중인 인터넷 은행과의 경쟁은 물론이고 초저금리로 ‘앉아서 돈 번다’는 소리도 옛말이 됐다. 
 

[은행원리포트] 4대 은행 직원 7명 심층 인터뷰

은행원들이 말하는 은행원은 어떤 직업일까. 4대 시중은행에서 근무 중인 직원 7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3년 차 행원, 7년 차 대리, 13년 차 차장부터 20년 차 이상 부장까지 다양한 직급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의 요청에 따라 가명의 두 인물을 내세워 인터뷰를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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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차 김정민(가명) 대리 이야기 

“카드 100개 하라 소리에 퇴사 고려”

처음부터 은행에 들어오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IT 대기업에 가고 싶었죠. 그런데 채용 공고를 보니 은행에서도 디지털 인력을 뽑는다는 거예요. 안정적인 직장에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지원했습니다. 

 
막상 입행해보니 아직까지 은행은 제너럴리스트 위주예요. 디지털 인재든 뭐든, 지점 근무 경험은 무조건 필요하다는 식이죠.  
 
입행하면 영업점으로 배치가 되고 당장 실적 압박에 시달려요. 1년 차 때 지점장님이 “신입은 어차피 할 줄 아는 일이 없으니 신용카드 100장씩 가입 받아오라”고 했을 때 퇴사하고 싶더라고요. 매일 아침 누가 카드를 몇 장, 개인형퇴직연금(IRP) 계좌를 몇 개 만들었는지 공지가 떠요. 이런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갑질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지. “눈빛이 싸가지가 없다”며 컴플레인 건 고객도 있었어요. 저한테 업무를 보지도 않았으면서요. 이런 사례는 웃고 넘기는 수준이죠. 결국 은행원은 서비스직이거든요.  
 
은행원 라이프 ‘말말말’.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은행원 라이프 ‘말말말’.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앱 100개 깐다고 디지털인가요?”

얼마 전 오픈뱅킹이 생겼잖아요. 애플리케이션(앱)이 나오면 지점마다 할당량이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할머니·할아버지가 오셔도 핸드폰에 앱을 깔아드려요. 회의감 들죠. 종이에 계좌 번호 써서 이체하시는 분들한테 오픈뱅킹을 설치해드린다는 게요. 이걸 백만개 깔았다고 한들 디지털화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나요?
 
물론 단점만 있는 건 아녜요. 다른 업종에 비해 직원 재교육은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리스크 관리나 기업 여신 같은 전통 금융업 교육은 당연하고요. 코딩이나 빅데이터 분석도 회사에서 가르쳐줘요. 마음만 먹으면 자기계발 기회가 많죠. 
 

주 52시간제로 워라밸은 향상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이후 분위기가 달라진 건 사실이에요. 핵심성과지표(KPI) 수치도 하향 조정했죠. 예전엔 방카슈랑스 10개 판매를 목표치로 주면서 13개 따오길 기대했다면 이젠 7개만 해도 욕먹지는 않는 분위기랄까요. 요즘엔 위험도 낮은 상품을 팔아도 사후 콜이 가요. 고객이 설명을 충분히 들었다고 유선상으로 확인을 해주셔야 상품 판매가 종결되는 식이죠. 
 
선배들도 “오늘 이만큼 못 팔면 집에 가지 말라”곤 못해요. 예전 신입 행원들은 아침 6시 반에 은행 문 열고 자정이 다 돼서 돌아가는 분위기였거든요. 제가 입행할 때만 해도요.
 
지금은 6시가 되면 컴퓨터가 셧다운 돼요. ‘나인투식스(9 to 6)’도 잘 지켜지고요. 이 정도 월급에 육아 휴직 2년씩 주는 회사 드물긴 하죠. 여자한테 더 좋은 직장이라고도 해요. 오후 4시에 은행 문 닫으면 여자 행원들이 주로 맡는 수신계 업무는 끝나니까요. 
 

본부의 꿈…현실은?

은행원이라면 누구나 본부에 가고 싶어해요. 영업 압박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본부 가는 게 쉽지 않아요. 예전에는 대리급에도 문이 열려있었다면 지금은 과장은 달아야 가는 식이죠. 본부에 가도 결국 영업점으로 순환 근무를 하게 되고요. 얼마 전 기사 보셨죠? 대학생들이 취업하고 싶은 은행 1위가 카카오뱅크래요. 카뱅의 장점은 모두가 본부에서 일한다는 거예요. 
 

후배에게 한마디

장점이 많은 직업이라는 건 확실해요. 월급·안정성·복지 다 갖춘 회사 많지 않잖아요. 금융권 빼면 문과가 취업할 곳도 별로 없고요. 그렇다고 여기가 너무 좋다는 건 아녜요. 퇴직하고도 인생이 긴데 여긴 이직이나 전직할 곳이 마땅치가 않아요. 우리나라 은행은 IB(투자은행) 같은 특수 분야가 없으니 다른 일을 할 생각을 하기도 어렵고요. 은행원으로 일해서 너무 행복하다는 사람은 제 주변엔 없어요. 적어도 또래 중에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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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차 이광식(가명) 부장 이야기

“백 퍼센트 디지털은 어려워” 

은행원이 사라질 거라고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깁니다. 단순 업무가 사라지는 건 분명해요. 이제 자동화기기(ATM)로 통장 발급까지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덕분에 은행원들이 핵심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펀드 상담하면서 고객에게 10분을 드렸다면 앞으로는 30분, 1시간 상담을 해드릴 수 있다는 거죠. 결국 은행이 파는 건 무형의 상품이잖아요. 신뢰가 필요하거든요.
 
비대면 상품만 이용하는 고객과, 영업점·비대면 채널을 둘 다 이용하는 고객을 보면 후자가 자산 규모도 크고 투자 상품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요. 금융 상품이 워낙 복잡하잖아요. 금융 소외 계층도 많고요. 전부 디지털로 갈 순 없어요. 수십억대 자산가들이 금융 상품을 살 때 비대면을 선호할까요? 수백억을 빌려주는 은행원이 공장 실사 한 번 안 가고 대출을 실행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간단한 문제죠.
 

실적 압박? 못 채워도 잘리진 않아

하루에 청약 몇 개, 펀드 몇 개 가입시켜야 한다는 숫자에만 급급하면 결국 은행에도 고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은행원이 되는 겁니다. 은행 상품이 한두 개가 아니잖아요. 지금 펀드 시장이 안 좋다면 이 고객에게 펀드 대신 어떤 상품을 추천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거죠. 은행원들 실적 압박 심하다곤 하지만 실적 못 채웠다고 잘리나요? 월급이 깎이는 것도 아니거든요. 
 

“은행보다 복지 좋은 곳 있나”

나인투식스를 지키면서 시간 외 근무가 발생할 때 확실한 금전 보상을 주는 것. 이게 워라밸 아닌가요? 인사팀에서 복지 정책을 검토할 때 대기업 정책을 참고하거든요. 다 뒤져봐도 금융권보다 복지 좋은 곳 많지 않습니다. 증권사 가면 성과급 많이 받는다고요? 반대로 성과가 없을 땐 죽 쑨다는 얘기잖아요. 성과급제가 좋기만 한 건 아니거든요.  
 
카카오뱅크? 좋은 회사죠. 그런데 시중은행도 생각만큼 답답한 곳은 아니에요. 주 52시간제 시행되고 가장 많이 바뀐 곳이 금융계일 겁니다. 의사 결정 과정도 많이 슬림해졌고요. 빅데이터니 머신러닝이니 하는 부서가 얼마나 많이 생겼나요. 본부 부서를 중심으로 젊은 직원들에 대한 수요도 커질 겁니다. 외부 채용도 늘어 공채 위주 문화도 바뀌겠죠.  
 

결국 서비스직…고객 도우며 보람 찾아야

저는 이 말이 하고 싶어요. 은행원이 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다고요. 은행원이라는 직업이 사라질지, 아닐지에 대한 논의는 일단 접어둘게요. 이자수익 줄어든다는 거 하루 이틀 나온 얘기 아니잖아요. 
 
아직도 금융소외계층이 생각보다 많아요. 국민 소득 수준에 비해 금융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 점에서 은행원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 거죠. 실제로 영업점에서 근무하면서 소액이라도 고객 자산 관리에 도움을 드렸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끼는 은행원들이 많거든요. 그런 일이 적성이 맞다면 도전해 볼 가치가 있겠죠.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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