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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아버지의 번호···" 011·017과 이별 못하는 사연

중앙일보 2020.06.22 06:00
011 광고.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011 광고.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22년 지기 친구를 잃는 기분입니다. 011 전화번호를 쓰며 10년 넘게 연락이 끊긴 지인이 먼저 연락 온 적이 있습니다. 인생 희로애락이 얽혀 있는데 번호를 지키고 싶습니다.”

 
011 사용자인 직장인 A씨(39) 얘기다. ‘01X’ 전화번호를 쓰는 가입자들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 길게는 수십 년 쓴 번호를 떠나보내야 할 처지에 놓여서다.  
 
21일 이동통신 업계 등에 따르면 011과 017로 시작하는 SK텔레콤의 2G 이동통신 서비스가 이르면 다음 달 초부터 순차적으로 종료한다.
 

“폐업 고려” 갖가지 사연들

가수 김종국도 '011' 번호를 유지하다 최근에서야 바꿨다고 한다. 2018년 한 방송에서 이를 설명하는 배우 장혁. SBS 방송 캡처

가수 김종국도 '011' 번호를 유지하다 최근에서야 바꿨다고 한다. 2018년 한 방송에서 이를 설명하는 배우 장혁. SBS 방송 캡처

A씨는 22년 전인 고등학교 1학년 때 휴대전화를 갖고 싶어 술에 취해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투정부린 당시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A씨는 “친구들은 모두 휴대전화를 썼는데 혼자만 삐삐를 쓰는 게 싫어서 어머니께 술주정을 부렸다”며 “그 후 지금껏 번호를 단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고·대 동창이 유일하게 외우는 전화번호는 내 번호밖에 없다고 한다. 상대방이 혹시나 하고 전화했는데 번호가 안 바뀌어서 끊겼던 인연이 다시 이어진 적도 있다”며 “이 번호를 거쳐 간 수많은 사연이 하루아침에 없어져 버린다고 생각하니 먹먹하다”고 덧붙였다.  
20일 '010통합반대운동본부'에 올라온 글. 인터넷 캡처

20일 '010통합반대운동본부'에 올라온 글. 인터넷 캡처

A씨처럼 01X 번호에 애착을 가진 이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010통합반대운동본부’ 회원들은 인터넷 카페를 통해 “2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사용하던 번호를 이어받았다” “대학과 직장 합격 전화를 받은 번호라 애틋하다. 이 번호는 ‘또 다른 나’다” 등 01X를 쉽사리 놓지 못하는 이유를 털어놓고 있다. 
생업과 연결된다는 주장도 있다. 한 회원은 “겨울 한 철 장사하는데 이 번호로만 연락이 온다. 몇 년에 한 번씩 생각이 난다며 가끔 찾아주는 분도 있다”며 “번호를 바꾸면 영업손실이 상당해 폐업도 고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회원은  “20년째 011을 사용하고 있는데 2014년 투자한 보증금을 아직도 돌려받지 못했다”며 “채무자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번호를 바꿀 순 없다. 꼭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번호 변경 후 자동연결 서비스가 종료되는 시점에 연락이 온 고객이나 채무자와는 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알박기' 오해와 무관”  

011 광고. 배우 한석규가 나왔다. 유튜브 캡처

011 광고. 배우 한석규가 나왔다. 유튜브 캡처

이들이 이른바 ‘알박기’로 불리는 보상이나 혜택을 바라고 01X를 붙잡고 있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이에 대해 A씨는 “그런 오해도 많이 받지만, 현실적으로 주어지는 건 없다”며 “보상이 아닌 그저 전화번호를 원할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010통합반대운동본부 측도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하지 않는 이유는 알박기 주장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에 추진해서는 안 된다”고 밝혀둔 상태다. 업계에서도 2012년 SK텔레콤에 앞서 2G 서비스를 종료한 KT 사례를 봤을 때 특별한 추가 보상은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일부 01X 사용자들은 “01X 번호를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취지의 헌법소원이나 민사소송을 준비하는 등 법적 다툼을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관련 소송이 과거부터 제기됐으나 줄줄이 패하거나 기각됐기 때문에 이번 역시 승산이 낮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로 2012년 01X 이용자들이 헌법재판소에 번호를 변경 없이 쓰게 해달라는 헌법소원을 냈던 당시 헌재는 “휴대 전화번호는 국가의 자원이자 공공재이며 개인의 사적 재산으로 볼 수 없다”며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각하했다.  
 
앞서 지난 1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SK텔레콤이 2G 서비스 폐지를 위해 신청한 기간통신사업 일부 폐지신청 건에 대해 이용자 보호조건을 부과해 승인했다고 밝혔다. 기존에 쓰던 01X 번호 유지를 희망하는 가입자는 내년 6월까지 번호를 유지할 수 있다. SK텔레콤이 2G 서비스를 종료하면 국내 이동통신 3사 가운데 LG유플러스만 2G 서비스를 운영하게 된다.
 
채혜선 기자 chae.hyeseon@joongang.co.kr
'010 번호통합정책'은
정부는 2011년 ‘010 번호통합정책’을 시행했다. 011·017 같은 통신사 식별번호가 브랜드화하고 독과점 현상이 심해지면서다. 2012년 KT가 2G 서비스를 종료했다. 정부는 010 번호통합이 이뤄지면 전 국민이 8자리만 눌러 통화할 수 있는 편익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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