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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의 경지란 이런 것, 한국 서예 1세대를 만나다

중앙일보 2020.06.22 00:03 종합 18면 지면보기
한국 서예 거장 23인의 대표작 115점이 한자리에 나왔다. 20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근대서예명가전’ 얘기다. 예술의전당(사장 유인택)과 한국서예단체총연합회(회장 권창륜)가 공동 주최하는 이 전시는 조선 왕조 말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반 활동한 한국 서예 1세대 명인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드문 기회다.
 

한국근대서예명가전 20일 개막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서 열려
거장 23인 작품 115점 한자리에
“한국 서예사 조망 역사적 전시”

대가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묵향은 진하게 살아 있다. 소전 손재형의 ‘사해인민송태평’(사진 왼쪽). 갈물 이철경의 ‘시편 제1편 전문’(오른쪽). [사진 한국서총]

대가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묵향은 진하게 살아 있다. 소전 손재형의 ‘사해인민송태평’(사진 왼쪽). 갈물 이철경의 ‘시편 제1편 전문’(오른쪽). [사진 한국서총]

작가는 소전(素荃) 손재형(1903~1981), 원곡(原谷)김기승(1909~2000), 일중(一中) 김충현(1921~2006)을 비롯해 석재(石齋) 서병오(1862~1935), 갈물 이철경(1914~1989), 검여(劍如) 유희강(1911~1976) 등. 개인 소장품에서부터 일중선생기념사업회·성균관대학교박물관·전주박물관·강암서예관의 소장품이 전시된다. 미공개 작품들도 적지 않다. 작품 설명에 한자와 한글을 병기하고 뜻풀이도 붙였다. 권창륜 한국서예단체총연합회 회장은 “이번 전시는 한국 서예의 전범(典範)을 찾고 21세기 한국 서예의 위상을 정리하고자 마련했다”며 “한국 서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후학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시대의 천재, 소전 손재형=전시작 중 소전이 1976년에 쓴 ‘四海人民頌太平(사해인민송태평)’을 보자. ‘온 백성이 태평을 노래한다’는 뜻으로, 모든 이들이 무탈하게 한 해를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읽힌다. 굵은 붓으로 힘있게 써내려간 글자에서 굳센 기상이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전남 진도 출신인 소전은 한국 근대서예사에서 천재성으로 주목받은 인물이다. 일찍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금석학과 고증학을 섭렵하고 전·예서와 한글 고체를 융합해 1930년대에 자신의 독특한 한글 전서체를 완성했다. ‘종근당’ ‘현대문학’ 제호도 그의 작품이다. 평생 추사(秋史)를 마음의 스승으로 여긴 소전이 1944년 추사 작품 ‘세한도’가 경매로 일본으로 넘어가자, 거금을 들고 일본의 소장가를 설득해 세한도를 찾아온 일화가 유명하다.
 
일중 김충현의 ‘독락원’. [사진 한국서총]

일중 김충현의 ‘독락원’. [사진 한국서총]

◆독보적인 일중체의 탄생=일중은 어릴 때부터 고전과 서예를 익히고, 18세에 궁체 연구를 시작해 한글 서예 근대화에 크게 공헌했다. 1947년에 최초의 한글 비문인 ‘유관순 기념비’를 쓴 이후 200점 이상의 비문을 궁체로, 100점 이상의 비문을 한글고체로 쓰며 30세 이전에 한글 서예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특히 훈민정음 등 한글 고판본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전예 필법을 융합해 자신만의 한글고체, 즉 일중체를 탄생시켰다.
 
이번 전시에선 1950년에 궁체로 쓴 이충무공기념비 탁본을 비롯, 국·한문 혼용 작품과, 행서에 초서가 어우러진 1988년 작 ‘독락원’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갈물의 단아한 궁체=한글 서예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갈물의 작품으론 ‘믿음 소망 사랑’ ‘김동길 풀어쓴 독립선언문’등이 전시됐다. 4세 때부터 한문 서예를 배운 갈물은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 재학시절 한글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이끌려 한글 쓰기에 전념했다. 조화미와 생동감이 돋보이는 갈물의 대형 작품을 직접 확인할 기회다.
 
검여 유희강의 ‘무량청정’(사진 왼쪽). 강암 송성용의 ‘죽림도’(오른쪽). [사진 한국서총]

검여 유희강의 ‘무량청정’(사진 왼쪽). 강암 송성용의 ‘죽림도’(오른쪽). [사진 한국서총]

◆검여, 의지로 빚은 명작=‘無量淸淨(무량청정)’은 ‘한없이 맑고 고요하다’는 뜻으로 검여가 1965년에 쓴 글씨다. 네 글자가 모두 살아 움직이는 듯,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1930~40년대 중국에서 서화와 금석학, 서양화를 섭렵한 검여는 평생 공부와 실험을 멈춘 적 없는 의지의 인물이었다. 1968년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었으나, 왼손 글씨를 수련해 발병 10개월 만에 첫 왼손 글씨를 출품했을 정도다. 이후 1976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개인전을 4차례나 열었다. 왼손 글씨는 오른손 글씨보다 더 진솔하고 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월정, 궁극의 조형미=‘游於藝(유어예)’. “예(藝)에 노닐다”라는 뜻을 담은 월정(月汀) 정주상(1925~2012)의 글씨는 힘과 자유분방함이 균형을 이룬 작품이다. 월정의 행·초서는 단아함과 유려함이 돋보인다. 대표 작품은 1991년작 ‘非文章草書(비문장초서)’다.
 
◆강암의 현대적인 죽림도=강암(剛菴) 송성용(1913~1999)은 내장산 내장사 현판과 불국사 불국선원 현판 글씨를 썼다. 그의 작품 중 가로 120㎝, 세로 175㎝ 크기의 죽림도는 압권. 가파른 비탈에 꼿꼿하게 선 대나무를 그린 공간 구성이 대담하고, 담묵과 농묵으로 표현한 대나무 잎의 조형미가 탁월하다.  
 
한태상 한국서가협회 이사장은 “이번 명가전은 고전을 섭렵하되, 자기 글씨를 완성한 한국 1세대 서예가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나는 진귀한 전시”라며 “앞으로 서예명가전 2부, 3부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8월 16일까지. 월요일 휴관, 무료 관람.
 
한국근대서예명가전 출품 23인
고봉주, 김기승, 김용진, 김응현, 김충현, 박병규, 박세림, 배길기, 서동균, 서병오, 서희환, 손재형, 송성용, 유희강, 이기우, 이철경, 정주상, 정환섭, 조수호, 최정균, 최중길, 현중화, 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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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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