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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정부의 ‘북 비핵화 의지’ 과대평가가 파국 불렀나

중앙일보 2020.06.22 00:02 종합 30면 지면보기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이 연일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회고록은 “2018년 3월 27일 판문점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회담한 문재인 대통령이 다음 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포함해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다’고 전했다”고 썼다. 이어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1년 안에 비핵화를 하도록 요청했고, 김정은이 동의했다”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했다고 볼턴은 회고했다. 볼턴은 “문 대통령의 이런 ‘과도하게 낙관적인 관점’과 대조적으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트럼프에게 ‘김정은을 믿지 말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이 회고가 사실이라면 문 대통령과 정부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대 해석해 미국에 과장되게 전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볼턴 “북·미 양측에 비현실적 기대 만들어”
사실이라면 ‘부실 중개’…정책 조정 시급

또 볼턴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을 판문점에서 열고, 후속으로 남·북·미 정상회담을 열자”고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김정은이 싱가포르를 선호해 물러섰다고 한다. 볼턴은 싱가포르 회담 전후 집중 거론된 ‘종전선언’에 대해서도 “원래는 북한의 구상인 줄 알았는데 나중엔 문 대통령의 통일 의제에서 나온 것으로 의심했다”고 썼다.
 
볼턴의 이런 회고를 종합하면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전후한 북핵 외교는 ‘북한 비핵화’란 근본 목표 대신 문 대통령의 ‘통일 의제’와 트럼프 대통령의 보여주기용 이벤트에 방점이 찍혀 있는 듯하다. 볼턴이 “북·미 외교는 한국의 창조물”이라며 “문 대통령이 북·미 양측에 비현실적 기대를 만들었다”고 비판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지난 2년간 미국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북한 지도자를 세 번이나 만난 배경엔 우리 정부의 역할이 컸다. 2018년 3월 평양에서 김정은을 만난 뒤 방미한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이 트럼프에게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고 전한 지 석 달 만에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실현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정은의 말뜻은 미국이 생각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북한 비핵화(CVID)’가 아니라 주한·주일미군의 핵전력 폐기를 전제하는 ‘조선반도 비핵화’였음이 그 뒤 북한의 행태를 통해 드러난 지 오래다.
 
이를 우리 정부가 몰랐는지, 아니면 알고도 속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이 남북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도발하는 한편 미국에도 ‘종말’ 운운하며 협박을 재개한 지금으로선 정부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과잉 전달했다는 지적을 반박하기 힘든 처지에 몰렸다. 정부는 이제라도 막연한 낙관론과 국내정치적 계산 대신 팩트와 동맹에 기반한 냉정한 현실주의로 대북정책 기조를 재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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