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오래]규장각 돌아나오면 봉모당, 봄날 앵두꽃 눈부신 이곳

중앙일보 2020.06.21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19)

서편 궐내각사. 중간에 냇물이 흐르는 구조를 띠고 금천의 동쪽엔 옥당과 약방이 금천의 서쪽엔 규장각과 검서청이 있었다. [사진 문화재청]

서편 궐내각사. 중간에 냇물이 흐르는 구조를 띠고 금천의 동쪽엔 옥당과 약방이 금천의 서쪽엔 규장각과 검서청이 있었다. [사진 문화재청]

 
검서청(檢書廳)은 규장각의 동쪽에 있다. 동궐도에는 대유재(大酉齋)로 표기되어 있는데 건물 동쪽으로 금천이 흐르고 있어 검서청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검서청 마루에 앉아 뒷마당에 핀 앵두꽃을 바라보는 풍경은 눈에서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데 옛날처럼 물길이 흘러 물소리를 들을 수 있던 시절 검서청 풍경은 더욱 특별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검서청은 규장각의 검서들이 입직을 서던 규장각의 부속건물이다. 정조는 1779년 규장각에 검서관 네 명을 두었는데 서이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이다. 이들은 조선시대 관리등용에 차별을 받던 서얼 출신으로, 무관 7품의 낮은 관직이었지만 당시 이들 사검서의 등용은 파격이었다. 검서관들은 돌아가면서 밤새 입직을 하였는데 처음에는 적당한 입직실이 없어서 규장각 구석방에 대기하다가 1783년 규장각 왼편에 부속건물을 지었는데 이것이 검서청이다. 정조 이후에는 대보단에 전배하기 전날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로 사용하였다.
 
규장각을 보고 다시 돌아 나오면 봉모당(奉謨堂)이 있다. 운한문 앞에 계단이 있고 담장아래는 앵두나무를 잔뜩 심어서 봄이면 흰 앵두꽃이 눈부신 곳이다. 늦은 봄날 난분분 날리는 개울가의 흰 꽃잎은 아주 잠깐 볼 수 있는 봄날의 정취이다.
 
동궐도에는 소유재(小酉齋)로 표기 되어 있다. 봉모당은 역대 선왕의 유품을 보관하던 전각으로 봉모(奉謨)는 모훈의 자료를 받들어 간직한다는 뜻이다. 정조 때 역대 선왕들의 유품, 어제, 어필, 어화, 고명, 유고 등을 옛 열무정 건물로 옮기고 봉모당이라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정조 사후 규장각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철종 8년(1857)에 후원 내의 봉모당 기능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곳에 있던 장서는 1969년 창경궁 장서각(藏書閣)으로 옮겨졌다.
 
 
천연기념물 제194호 창덕궁 향나무. 나무의 나이는 약 7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천연기념물 제194호 창덕궁 향나무. 나무의 나이는 약 7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봉모당을 왼편에 두고 걸으면서 동쪽의 억석루와 구선원전을 구획 짓는 담장이 주는 시각적인 차단으로 전각 안쪽 부분에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구도가 형성된다. 발아래 이어지는 금천의 물길과 수각, 담장 위로 펼쳐지는 인정전을 비롯한 동쪽 영역의 전각들이 보여주는 지붕선의 구성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구선원전 영역으로 진입하기 전, 은행나무를 등지고 다리 위에 서서 오던 길을 바라보는 여유와 지나온 좁은 문의 운치를 느껴보시기 바란다. 봉모당을 지나 서쪽으로 천연기념물 향나무가 그 웅장한 위용을 보여주고 책고와 은행나무의 장대한 풍광도 아름답다. 규장각이나 검서청이 가까워 여러 서책을 보관하던 책고(冊庫)가 있는 곳이다.
 
다리를 건너 담장 안으로 들어서면 선원전 남쪽 행각에 위치한 2층집 억석루(憶昔樓)가 보인다. 《한경지략》에 영조가 신농씨(神農氏)의 위판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내의원(內醫院)에 명하면서 “입심억석(入審憶昔)”이라는 네 글자를 써주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내의원에 속한 부속 건물로 볼 수 있다.
 
선원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다. [사진 문화재청]

선원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다. [사진 문화재청]

 
궁궐 안의 사당 선원전(璿源殿)
선원전은 왕실의 정통성을 세우고 왕실의 근원과 흐름을 알게 하는 인도로 선왕을 섬기던 진전(眞殿)이다. 태조와 현 왕의 4대조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을 모셔 놓고 초하루 보름, 생신, 기제사 등 수시로 다례를 올리던 곳이다. 봄가을로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례를 올리는 종묘(宗廟)가 국가의 사당이라면 선원전은 왕실 사당으로 볼 수 있다. 왕실에 기쁜 일이 있거나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도 왕들은 선원전에 전배하고 고했다. 또한 자식의 도리로서 제주도에서 진상되는 귤 같은 귀한 제철 과일을 처음 선원전의 조상께 올리는 일은 일반 사가의 정다운 풍습과 같았다. 선원전 옆의 양지당(養志堂)은 임금이 선원전에서 재를 올리기 전 머물던 곳으로 어재실(御齋室)이다. 어진을 담은 궤를 보관하기도 하였고 영조가 자신의 옷을 보관하게 한 기록도 있다.
 
임금이 선원전에서 재를 올리기 전 머물던 양지당. [사진 문화재청]

임금이 선원전에서 재를 올리기 전 머물던 양지당. [사진 문화재청]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5월 3일 2번째기사
임금이 근정전에서 하례를 받고, 경내에 사유하다
부모의 은혜를 보답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경(禮經)》의 떳떳한 일이며, 죽은 이를 산 사람같이 섬기는 것은 지극한 효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대의 제왕이 이미 종묘를 세워서 태고의 예를 숭상하는 것은 신성히 여기는 까닭이며, 또 원묘(原廟)를 설치하여 평상시와 같이 섬기는 것은 친근하게 하는 까닭이다.
 
조선 중기 선원전의 유래는 숙종 21년에 창덕궁 인정전 서편의 춘휘전에 왕의 어진(御眞)을 보관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숙종 대 창덕궁에 세워진 선원전은 숙종 재위 시에는 어진을 궤 속에 넣어 한쪽에 보관하는 장소였으나 숙종 사후, 경종 즉위년(1720)부터 선왕의 어진을 어칸에 전봉(展奉)하고 의례를 거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 후로 선원전은 열성의 어진봉안뿐만 아니라 어진을 펼쳐놓고 의례를 행함으로써 선왕의 위엄과 정통성을 상징하는 장소로 기능이 확대되었다.
 
대한제국 기에는 각 궁별로 선원전이 존재했으며 왕이 궁을 이어할 때 마다 어진도 함께 이봉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복궁 선원전이 헐려나갔고, 1921년에는 고종의 3년 상이 끝나는 것을 계기로 경운궁 선원전이 헐리고 창덕궁 후원에 12칸의 신선원전이 건립되었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이향우 이향우 조각가 필진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 교사로 명예퇴직 후 조각가로 작품을 제작하면서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를 배우고 알리는 궁궐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궁궐에서의 오랜 활동을 바탕으로 조각가의 심미안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궁궐의 아름다움을 직접 그리고 글을 썼다. 우리 궁궐의 정다운 이야기를 들어보자.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