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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떨어진' 가치투자…올 들어 4800억 빠지고, 수익률 -7.6%

중앙일보 2020.06.21 10:00
2014년 VIP자산운용(옛 VIP투자자문)의 '밸류형' 펀드에 1억5000만원을 가입했던 직장인 K(45)씨는 최근 펀드를 환매했다. 계좌로 들어온 환매대금은 1억5500만원. 별도로 냈던 수수료(225만원)를 빼면 수익금이 고작 275만원, 6년 누적 수익률이 1.8%에 불과했다. 그 기간 동안 운용사가 챙긴 수수료(별도납입수수료+계좌출금수수료) 총액은 1490만원. 배(수익금)보다 배꼽(수수료)이 훨씬 컸다. K씨는 "배당 수익률이 높고 저평가된 종목을 담는 전략을 쓰는 가치주 펀드였는데, 예금 이자보다 한참 못한 수익률을 기록했다"며 "가치투자의 끝물에 잘못 들어간 것 같다"고 후회했다.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대표와 존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중앙포토, 연합뉴스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대표와 존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중앙포토, 연합뉴스

쪼그라드는 가치주 펀드

'가치투자'가 수렁에 빠졌다. 단기는 물론 장기적인 투자 성적마저 저조하고, 펀드에서 돈이 계속 빠져나가면서 몸집도 쪼그라들고 있다. 가치투자는 기업 가치 분석을 통해 시장에서 저평가된 종목을 고른 뒤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하는 기법을 말한다. 주가수익비율(PER)과 주가순자산비율(PBR)로 주식을 평가하고, 버는 돈(순이익)에 비해 주가가 낮거나(저PER) 가진 재산(순자산)에 비해 저평가된(저PBR) 종목에 투자한다. 2012~2016년 강방천 에셋플러스자산운용 회장과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대표,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대표 3인방을 중심으로 황금기를 누렸다. 존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도 가치투자 전도사로 불렸다. 하지만 2017년부터 가치투자는 서서히 힘이 빠졌다.
수익률 부진한 가치주 펀드.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수익률 부진한 가치주 펀드.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간판' 펀드들 3년 수익률 -20%

가치투자의 위기는 숫자가 말해 준다. 21일 펀드평가사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97개 가치주 펀드의 연초 이후 평균 수익률은 지난 17일 기준으로 -7.61%였다. 국내 주식형 펀드 수익률(-2.98%)에도 못 미친다. 최근 3년간 수익률은 -16.42%에 이른다. 개별 펀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간판' 가치주 펀드로 꼽히는 'KB밸류포커스(A)'와 '신영마라톤(A)', '한국밸류10년투자1(C)'의 연초 이후 수익률은 각각 -11.35%, -11.06%, -7.7%로 코스피 수익률(-2.58%)조차 따라가지 못했다. 누적 기간을 3년으로 늘려서 보면 수익률은 -20% 전후로 더 나빴다. 
 
그러다 보니 투자자도 외면한다. 97개 가치주 펀드에서 올 들어서만 4800억원 넘는 돈이 빠져나갔다. 지난 5년간은 5조5000억원 넘게 유출됐다. 특히 '신영밸류고배당'에서 올해 들어 1025억원가량 빠져나갔고, '메리츠코리아1'과 '한국밸류10년투자1'도 설정액이 각각 440억원, 343억원 줄었다.  
주요‘간판’가치주 펀드 수익률.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주요‘간판’가치주 펀드 수익률.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성장주 선전에 가치주 소외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전문가들은 저금리 기조로 성장주에 유리하고 가치주에 불리한 시대가 왔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성장주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지만, 현재 이익 규모가 크지 않고 미래 가치가 높은 종목을 말한다. 인터넷·바이오·2차 전지 등이 대표적으로, 가치주와 대비된다. 성장주는 현재보다 미래에 큰 수익을 낼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미래 수익에 대한 할인율(금리)이 낮으면 현재 가치가 높아진다. 실제 가치주 펀드는 대형 성장주가 선전하는 시기엔 힘을 쓰지 못했다. 이른바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이 코스피를 끌어올렸던 2010~2011년이 그랬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국내 주요 산업이 가치주가 많은 전통산업에서 비대면 등으로 재편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 두드러졌다. 투자자들이 재무제표 수치보다 '미래'에 베팅한다는 얘기다. 
 
최준철 VIP자산운용 대표는 "시장의 관심이 바이오 등 성장주로 쏠리면서 비싼 주식이 더 오르고, 가치주는 소외되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며 "미국 등 해외 시장 상황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개인 투자자와 기관의 투자 방식이 바뀐 점도 이유로 꼽힌다. 익명을 원한 한 운용사 관계자는 "개인은 물론 연기금 등 기관도 단기간에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종목·상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며 "시장이 단기 투자에 매몰되면 저평가된 우량주를 발굴하고 투자하려는 힘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가치주 펀드 부활은 언제?

이런 분위기는 언제쯤 반전될까. 한동안 수익률 회복이 쉽지 않다는 전망이 우세하지만, 시장 사이클상 가치주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권민경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시기를 예상하긴 어렵지만, 시장이 달아올라 성장주의 고평가 부담이 커지면 가치주가 조명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후정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현 시장 상황은 가치주와 맞지 않는 색깔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치주로 돈이 몰릴 수 있다"며 "펀드 투자 땐 가치주와 성장주를 섞는 전략을 고려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황의영 기자 apex@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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