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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인들이 놀라고 감격한 전시, "대가의 경지란 이런 것"

중앙일보 2020.06.21 10:00
 소전이 쓴 '사해인민송태평'. 전세계가 고통을 겪는 시대에 더욱 울림있게 다가오는 글이다. [한국서총][

소전이 쓴 '사해인민송태평'. 전세계가 고통을 겪는 시대에 더욱 울림있게 다가오는 글이다. [한국서총][

지금까지 이런 서예전은 없었다. 한국 1세대 거장 23인 대표작 115점이 한자리에 나왔다. 20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근대서예명가전' 얘기다. 이번 전시는 예술의전당(사장 유인택)과 한국서예단체총연합회(회장 권창륜)이 공동 주최하는 것으로 조선 왕조 말기부터 새정부 수립 초반에 걸친 시기에 활발하게 활동한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드문 기회다.  
 

한국근대서예명가전 20일 개막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서 열려
거장 23인 작품 115점 한자리에
"한국 서예사 조망 역사적 전시"

소전(素荃) 손재형(1903~1981), 원곡(原谷)김기승(1909~2000), 일중(一中) 김충현(1921~2006),을 비롯해 석재(石齋) 서병오(1862~1935), 갈물 이철경(1914~1989), 검여(劍如) 유희강(1911~1976) 등 대 한국 서단의 역사를 써 내려 간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장을 채웠다. 전시작은 개인 소장품에서부터 일중선생기념사업회,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전주박물관, 강암서예관 소장품으로 평소엔 쉽게 볼 수 없었던 미공개 작품들도 줄줄이 나왔다.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을 위해 한자와 한글을 병기하고 뜻풀이도 덧붙여 이른바 '서알못(서예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즐길 수 있게 했다. 
 
권창륜 한국서예단체총연합회 회장은 "이번 전시는 한국 서예의 전범(典範)을 바로 찾고 21세기 한국 서예의 위상을 정리하는 계기를 삼기 위해 마련했다"며 "이번 전시가 한국 서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후학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시대의 천재, 소전 손재형 

소전 손재형 1970년 작, 소전미술관 소장. '사랑스럽게 봄산을 바라보니 그림책을 읽는가 싶고, 조용하게 옛 먹을 갈면 향기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네'라는 내용이다. [한국서총][한국서총]

소전 손재형 1970년 작, 소전미술관 소장. '사랑스럽게 봄산을 바라보니 그림책을 읽는가 싶고, 조용하게 옛 먹을 갈면 향기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네'라는 내용이다. [한국서총][한국서총]

전시작 중 소전이 1976년에 쓴 '사해인민송태평( 四海人民頌太平)'를 보자. 온 백성이 태평을 노래한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이 무탈하게 한 해를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읽힌다. 굵은 붓으로 힘있게 써내려간 글자에서 굳세고 씩씩한 기상이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코로나19로 전세계가 몸살을 앓는 시기에 더욱 남다른 무게감이 전해지는 글귀다. 
 
전남 진도 출신인 소전은 한국 근대서예사에 독보적인 천재성을 보여준 인물로 꼽힌다. 일찍이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금석학과 고증학을 섭렵하고 전·예서와 한글 고체를 융합해 1930년대에 자신의 독특한 한글 전서체를 완성했다. '종근당' '현대문학' 제호도 그의 작품이다. 평생 추사(秋史)를 마음의 스승으로 여긴 소전이 1944년 추사 작품 '세한도'가 경매로 일본으로 넘어가자 거금을 들고 일본에 찾아가 소장가를 설득해 세한도를 찾아온 일화가 유명하다. 
 

독보적인 일중체의 탄생 

일중 김충현이 68세에 쓴 '독락원'. [한국서총]

일중 김충현이 68세에 쓴 '독락원'. [한국서총]

일중은 어릴 때부터 고전과 서예를 익히고 18세에 궁체 연구를 시작해 한글 서예 근대화에 큰 공헌을 했다. 1947년에 최초의 한글 비문인 '유관순 기념비'를 쓴 이후 200점 이상의 비문을 궁체로, 100점 이상의 비문을 한글고체로 쓰며 30세 이전에 한글 서예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특히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월인석보 등 한글 고판본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자기만의 전예 필법을 융합해 자신만의 한글고체, 즉 일중체를 탄생시켰다. 
 
이번 전시에선 1950년에 궁체로 쓴 이충무공기념비 탁본을 비롯, 국·한문 혼용 작품과, 행서에 초서가 어우러진 1988년 작 '독락원' 등 다양한 작품을 함께 볼 수 있다. 
 

갈물의 이토록 단아한 궁체 

아름다우면서도 생동감이 감도는 갈물의 궁체 '시편 제1편 전문'. [한국서총]

아름다우면서도 생동감이 감도는 갈물의 궁체 '시편 제1편 전문'. [한국서총]

단아한 궁체로 한글 서예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갈물의 작품으론 '믿음 소망 사랑' '김동길 풀어쓴 독립선언문'등을 볼 수 있다. 4세 때부터 한문 서예를 배운 갈물은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 재학시절 한글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이끌려 한글 쓰기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조화미와 생동감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갈물의 궁체를 대형 작품으로 직접 확인할 기회다. 
 

검여, 불굴의 의지로 빚은 명작  

검여가 쓴 '무량청정'. 글씨에 담긴 기백이 눈길을 끈다. [한국서총]

검여가 쓴 '무량청정'. 글씨에 담긴 기백이 눈길을 끈다. [한국서총]

'無量淸淨(무량청정)'은 '한없이 맑고 고요하다'는 뜻으로 검여가 1965년에 쓴 글씨다. 네 글자가 모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듯하다. 1930~40년대 중국에서 서화와 금석학, 서양화를 섭렵한 검여는 평생 공부와 실험을 멈춘 적이 없는 의지의 인물이었다. 1968년 뇌출혈이 일어나 반신불수가 되었으나 왼손글씨를 수련해 발병 10개월 만에 첫 왼손글씨를 출품했을 정도다. 이후 그는 1976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개인전을 4 차례나 열었으며 그의 왼손글씨는 오른손글씨보다 더 진솔하고 힘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월정, 궁극의 조형미 

 월정 정주상이 쓴 '유어예'. '예에 노닐다'라는 뜻이다.[한국서총]

월정 정주상이 쓴 '유어예'. '예에 노닐다'라는 뜻이다.[한국서총]

월정의 '비문장초서'. [한국서총]

월정의 '비문장초서'. [한국서총]

'游於藝(유어예)'. "예(藝)에 노닐다"라는 뜻을 담은 월정(月汀) 정주상(1925~2012)의 글씨는 힘과 자유분방함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룬 작품이다. 월정의 행·초서는 단아함과 유려함에서 따를 이가 없다는 평을 받는다. 특히 탄성을 자아내는 게 1991년작 '非文章草書(비문장초서)'다. 마치 리듬을 타고 물 흐르듯이 초서로 써내려간 끝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뜻이 담긴 글거리가 아니어도 서(書)는 예술((藝術)이다'. 서예가 지닌 궁극의 조형미를 예찬한 작품 앞에서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강암의 현대적인 죽림도

강암 송성용의 '죽림도'. 1955년 작이다. [한국서총]

강암 송성용의 '죽림도'. 1955년 작이다. [한국서총]

내장산 내장사 현판과 불국사 불국선원 현판 글씨를 쓴 강암(剛菴) 송성용(1913~1999)의 묵죽도와 죽림도 등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특히 가로 120㎝, 세로 175㎝ 크기의 죽림도는 압권이다. 가파른 비탈에 꼿꼿하게 서 있는 대나무를 그린 공간 구성이 대담하고, 담묵과 농묵으로 다채롭게 표현한 대나무 잎이 탁월한 현대적 조형미를 보여준다. 
 

21세기 서예의 길을 모색하다  

철농 이기우의 '덕여해수사산'. 덕은 바다처럼 넓고 수명은 산같이 장구하다는 뜻이다. 1955년에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대미가 두드러진다. [한국서총]

철농 이기우의 '덕여해수사산'. 덕은 바다처럼 넓고 수명은 산같이 장구하다는 뜻이다. 1955년에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대미가 두드러진다. [한국서총]

석봉 고봉주의 '진한유법' '조충지기'. 석봉은 전각예술의 불모지를 개척한 선구자다. [한국서총]

석봉 고봉주의 '진한유법' '조충지기'. 석봉은 전각예술의 불모지를 개척한 선구자다. [한국서총]

21일 전시장을 찾아 작품을 둘러본 서예인들은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한태상 한국서가협회 이사장은 "한국 1세대 서예 명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보는 정말 진귀한 전시"라며 "이 대가들이 고전을 섭력하되 궁극적으로는 자기 글씨를 완성한 점이 특히 감동적이다.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앞으로 서예명가전 2부, 3부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영기 한국서도협회 회장도 "여기서 만나는 작가들은 해방 이후 최고의 작가들인 동시에 새로운 서체를 만드신 분들"이라며 "그야말로 한국 서예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하게 해주는 역사적인 전시다. 이번 전시가 앞으로 서예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8월 16일까지. 월요일 휴관, 무료 관람. 
 
◆근대서예명가 23인=고봉주, 김기승, 김용진, 김응현, 김충현, 박병규, 박세림, 배길기, 서동균, 서병오, 서희환, 손재형, 송성용, 유희강, 이기우, 이철경, 정주상, 정환섭, 조수호, 최정균, 최중길, 현중화, 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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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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