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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대한민국은 전쟁영웅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중앙일보 2020.06.19 00:40 종합 24면 지면보기

백선엽 장군 국립묘지 안장 논란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왼쪽)이 지난해 11월 99세 생일을 맞은 백선엽 장군을 축하하고 있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백 장군은 진정한 전사이자 지도자이며 오늘날에도 영감을 준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친일파 논란으로 전쟁 영웅 백선엽에 대한 평가가 희석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연합뉴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왼쪽)이 지난해 11월 99세 생일을 맞은 백선엽 장군을 축하하고 있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백 장군은 진정한 전사이자 지도자이며 오늘날에도 영감을 준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친일파 논란으로 전쟁 영웅 백선엽에 대한 평가가 희석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연합뉴스]

“다른 곳에선 호국영령이란 말을 쓰지만, 이곳에선 구국영령이라 표현합니다.”
 

해외에서도 평가받는 전설적 명장
국내선 2009년 친일파 명부 등재
만주군 시절 직접 독립군 토벌 안해
공적과 과오는 함께 저울에 올려야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만난 신슬우 관장이 무명용사들의 유해가 합장된 봉분을 가리키며 한 말이다. 1950년 다부동전투에서 이겨 6·25 전쟁의 물줄기를 돌림으로써 자칫 지도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한 대한민국을 구해냈다는 의미라고 그는 강조했다.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간 이어진 처절한 전투에서 다부동이 뚫렸더라면 낙동강 방어선이 궤멸되고 부산까지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장비와 병력 모두 중과부적이라 얼마나 버틸지가 관건이던 싸움을 끝내 이겨 북상의 고삐를 낚아챈 명장이 바로 당시 1사단장이던 백선엽 장군이다. 병사들보다 앞장서면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고 독려했다. 미 육군사관학교 교재에도 등장하고 2017년까지 해마다 일본 육상자위대 간부후보생 400명이 다부동 전적지 답사에 나서는 등 세계 전사(戰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전투다. 그는 6·25 전쟁 중 ▶최초 평양 입성 ▶서울 재탈환 ▶31세 최연소 참모총장 ▶한국군 최초 대장 진급 등 숱한 기록에 빛나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만100세인 그는 올해 초부터 입원투병 중이다. ‘살아있는’이란 수식어를 떼야 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
  
백선엽은 과연 ‘악랄한 친일파’였나
 
1950년 평양 입성 직전 밀번 미 제1군단장에게 작전을 설명하는 백 장군. [중앙포토]

1950년 평양 입성 직전 밀번 미 제1군단장에게 작전을 설명하는 백 장군. [중앙포토]

박삼득 보훈처장은 지난달 28일 “백선엽 장군은 현충원 안장 대상이 맞고 다른 의견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서울 현충원은 장군 묘역이 만장(滿葬)이어서 대전 현충원으로 모실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친일파’ 백선엽을 국립묘지에 모시면 안 된다는 주장이 여당 정치인과 진보 단체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김병기·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립현충원에 묻힌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을 파묘(破墓)해 다른 곳으로 옮기는 내용의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백선엽 장군 가족과 교분이 두터운 관계자가 이렇게 전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서울 현충원의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한다는 방침이 내부적으로 있었다. 현충원장과 함께 직접 묘역을 보기도 했다. 현 정부는 대전 현충원의 장군묘역에 안장할 수 있다고 한다. 미국 거주 중인 큰딸을 포함해 가족들은 국가가 정하는 대로 따른다는 입장인 것으로 안다. 하지만 최근 법 개정 움직임이 있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사후에 누를 끼치는 일이 일어나선 안 되기 때문에 다른 제3의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지난해 가족, 측근들이 다부동 전적지를 둘러 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본인의 뜻을 가장 잘 아는 가족들이 정부와 협의해 최종 결정할 것으로 생각한다.”
 
백선기 칠곡군수는 “4~5년 전 백 장군을 찾아뵈었을 때 ‘다부동 인근에 땅을 사둔 게 있다’며 ‘전우들의 넋은 다부동 산하에 누워있는데 내가 국립묘지로 간들 편히 발을 뻗을 수 있겠나’는 말을 하시더라. 안장 문제는 결국은 정부와 가족이 정할 일 아니겠나”고 말했다.
 
6·25 전공이나 그 이후 공직자로서의 행적으로 볼 때 국립묘지 안장이 지극히 당연한 결론인데도 시비가 끊이지 않는 건 ‘친일파’ 논란 때문이다. 젊은 날의 백선엽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 심지어는 ‘학살’했다는 표현까지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과연 백선엽은 구체적으로 어떤 친일 행위를 했을까. 필자는 일본에서 나온 『만주국군』 등 관련자료를 조사해 보았다.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에 펴낸 보고서는 백선엽에 대해 “1941년부터 45년 일본 패전 시까지 일제의 실질적 식민지였던 만주국군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협력하였고, 특히 항일세력을 무력 탄압하는 조선인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 장교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이라고 기술했다.
 
백선엽은 1940년 만주군관학교(2년제)에 들어가 42년 2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하고 처음 1년간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43년 2월부터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한 경력 때문이다.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군대 가운데 하사관 이하는 전원 조선인으로 구성됐고, 간부는 일본인이 위주가 되었던 대대급 정도의 부대다. 일제 괴뢰국가인 만주국은 ‘민족 협화’를 내걸고 몽고족, 백계 러시아인, 이슬람교도 등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특별부대를 편성했는데 간도특설대도 그중 하나였다. 만주 주둔 관동군을 주축으로 한 항일 무장세력 토벌활동에 동원됐다.
 
백선엽이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문장이 있다. “우리가 좇은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달라도 한국사람이 독립을 요구하며 싸운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니, 일본의 이이제이 책략에 빠져든 모양새였다” (1993년 『대 게릴라전』, 일본어판)  백선엽 자신이 독립군 소탕을 인정한 대목으로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원문의 앞뒤를 다 읽어보면 다른 표현들이 나온다. “내가 부임했을 때는 이미 게릴라 활동이 사그러들었고, 순찰은 나갔으나 게릴라와 교전한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백선엽은 2009년 "간도특설대 초기의 동족간 전투와 희생에 대한 가슴 아픈 소회를 밝힌 것일뿐, 본인은 전투행위 사실이 전무했다”고 진상규명위원회에 반박문을 보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부동지구전적비 기념관. 칠곡=송봉근 기자

다부동지구전적비 기념관. 칠곡=송봉근 기자

1930년대 만주의 항일 게릴라는 중국 공산당의 지휘를 받던 동북항일연군을 말한다. 양징위 등 지도부는 대부분 중국인 공산당원들이었고, 이 속에 김일성·최현(최룡해의 아버지)·오진우 등 조선인 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는 관동군을 주축으로 토벌작전을 벌여 양징위를 사살했고, 그 이후 김일성과 저우바우중(周保中) 등 항일연군 잔존 세력은 1940년 러시아 영토로 피신했다. 따라서 백선엽이 간도특설대로 부임한 1943년에는 만주 일대에 항일 세력이 사실상 소멸된 상태였다.  
 
조사위 보고서에는 백선엽이 간도특설대 활동 중 1944년 만주를 떠나 베이징 근처 미윈 지방으로 파견되어 토벌활동에 종사하였다고 적시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의 토벌대상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므로 독립군과는 다르다. 백선엽은 이때에도 “소대장으로서 주력부대가 아닌 단순 경비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며 본인이 토벌작전에 전면 참여하여 인명을 살상한 것처럼 한 것은 당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고 반박했다. 중국 측 자료에는 간도특설대가 민간인 잔혹행위를 했다는 증언이 있으나, 여기에 백선엽이 가담했는지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백선엽의 증언은 오히려 그 반대다. 주민들을 민심을 사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 팔로군에 포위되었을 때에도 중국인 주민들이 중재에 나서 교전을 피하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백선엽이 만주국 장교가 됨으로써 일제에 협력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40년대 중국 땅 어딘가에서는 한반도 진공작전을 준비하느라 땀 흘리는 광복군이 엄연히 존재했으며, 김준엽·장준하 등 일본 학병에서 탈출하여 사선을 뚫고 광복군을 찾아간 젊은이들도 있었다.
  
역사 그대로 사실을 마주해야
 
일제에 부역한 친일행위는 마땅히 비판받고 응분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비판과 심판이 일률적이어서는 안된다. 백선엽의 일제 협력이 인정되지만, 이완용과 을사5적 등의 매국 행위와 같이 취급될 수는 없다. 또한 구체적 행적에 있어서도 사실과 사실 아닌 것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더구나 한 인물을 평가할 때는 공(功)과 과(過)를 함께 저울에 올리고 형량해야 한다. 백선엽에게 과오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6·25 전쟁으로 대한민국이 처한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에서 발휘된 백선엽의 커다란 공헌을 덮을 수 없다. 공칠과삼(功七過三)이란 평가로 마오쩌둥(毛澤東)의 과오까지 감싸 안는 중국인들의 지혜를 빌릴 필요도 있다.
 
미국발 인종차별 시위의 여파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윈스턴 처칠과 샤를 드골 등 여태까지 위인으로 평가받던 인물들의 동상이 수난을 겪고 있다. 유색인종을 수탈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것이 시위대의 주장이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정부 지도자의 입장은 확고하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우리의 과거를 고치거나 편집하는 것은 역사 왜곡이라는 큰 거짓을 초래한다. 새로 등장한 잣대로 과거의 인물을 재평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고 때때로 반역사적이다”고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인종차별과 타협하지 않겠지만, 역사에 남아 있는 이름과 업적을 지우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 그대로 사실을 마주해야 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부정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들의 말 속에 대한민국은 백선엽 장군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들어있을 것이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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