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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의 문화탐색] 디자인 평론가의 영화보기

중앙일보 2020.06.18 00:33 종합 27면 지면보기
최범 디자인 평론가

최범 디자인 평론가

나는 영화를 영화관에서만 본다. 요즘 넷플릭스니 뭐니 해서 집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아직 그런 습관을 들이지 못하고 있다. 팬데믹 상황에서 주로 집에 박혀 있지만 가끔씩 답답할 때면 마실 나가듯이 혼자 살짝 나가서 영화를 보곤 한다. 그러다 보니 근래 들어 예전보다 영화를 더 많이 본 것 같다.
 

영화 ‘행복’의 시트로엥
일본 애니 속 도쿄도청사
도시·일상의 삶 생생 묘사
7년 뒤 디자인박물관 설립
한국 영화도 포함시켜야

디자인 평론가인 나는 아무래도 영화 속에 나오는 사물들에 관심이 많다. 그림보다 액자가 더 좋다는 어느 미술평론가마냥, 나도 미술관에 가면 작품보다 건물에 더 눈길이 간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는 미술관이 미술보다 더 미술 작품 같아 보인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처음 갔을 때 건물 입구에 건축가와 건축 연도 등을 새긴 명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이게 진짜 작품이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볼 때도 배우나 스토리 못지않게 영화에 나오는 물건이나 배경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영화 속의 디자인에 꽂혀서 정작 영화의 스토리를 놓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 본 영화 두 편에서도 그런 사태가 발생했으니, 하나는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고 또 하나는 아녜스 바르다의 ‘행복’이다.
 
영화 ‘행복’에 등장하는 프랑스의 원조 국민차 ‘시트로엥 2CV’(1939).

영화 ‘행복’에 등장하는 프랑스의 원조 국민차 ‘시트로엥 2CV’(1939).

‘언어의 정원’과 ‘너의 이름은’으로 알려진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신카이 마코토는 풍경 묘사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사실 그의 영화의 주인공은 날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어의 정원’은 도쿄의 신주쿠 교엔 이라는 공원이 배경으로, 특히 비 오는 장면이 일품이다. 나는 이 애니메이션이 동아시아의 몬순 기후를 가장 잘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계절풍이 불어오고 장마가 지면 무더운 여름이 시작된다는 것을. 이제 곧 맞게 될 그 계절 말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최근작인 ‘날씨의 아이’(2019)는 흐린 날씨를 맑은 날씨로 바꾸는 신묘한 능력을 가진 소녀의 이야기이다. 여전히 날씨가 주제이기는 한데, 내게는 날씨보다 도시 풍경이 더 볼거리였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도쿄도청사와 후지TV 건물이다. 둘 다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단게 겐조의 작품인데 도쿄도청사는 도쿄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고 도쿄만의 매립지인 오다이바에 세워진 후지TV 건물은 미래도시적인 느낌을 준다. 에도시대의 풍속화인 우키요에에서 볼 수 있는 부감법(俯瞰法,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포착된 도쿄의 풍경은 매우 역동적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인상파 회화가 근대의 도시 풍경화라면, ‘날씨의 아이’는 현대의 도시 풍경화로서 우키요에의 전통을 잇고 있는 셈이다. 주인공은 그 속의 건물들이고 말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단게 겐조의 작품 도쿄도청사(1991).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단게 겐조의 작품 도쿄도청사(1991).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 단란한 네 가족이 공원에 소풍을 나온다.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동안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말한다. 낮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이 엄마를 찾는데, 공원 한쪽이 소란스럽다. 아내가 연못에 뛰어들어 죽은 것이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 단란한 네 가족이 공원에 소풍을 나온다. 그런데 죽은 아내 대신에 새 아내가 그들과 손을 잡고 있다.
 
누벨바그의 여걸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행복’(1965)은 묘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양성의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부르주아 사회의 정상가족에 대한 물음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그런 것이라고? 프랑스어로 ‘행복(bonheur)’이 ‘좋은(bon)’ ‘시간(heur)’이라는 것도 이 영화를 보고 알게 되었다. 영화 내내 깔리는 모차르트의 음악과 밝고 아름다운 화면도 좋지만, 내 눈길을 끈 것은 프랑스의 원조 국민차 ‘시트로엥 2CV’였다. 이 영화에서는 목수인 남자 주인공이 모는 밴(van) 타입이 나오는데, 뒷부분인 캐빈에 아이들을 태우거나 자재 등을 싣고 다닌다. 독일 국민차인 ‘폴크스바겐 비틀’에 견줄만한 이 자동차는 정상가족의 행복만큼이나 표준화된 일상적 삶을 상징한다. 그래서 이 자동차는 이 영화에서 조연 이상의 역할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2027년 세종시에 최초의 국립 디자인박물관이 설립될 예정이다.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카이브와 컬렉션이 잘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디자인 아카이브에 영화도 포함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영화 이야기를 하니까 어릴 적 본 한국 영화 ‘마부(1961)’의 주인공 김승호의 모습이 떠오른다. 군용 방한모와 야전 잠바, 소달구지… 아마 안 될 거야. 이런 건 수집 안 할 거야. 그럼 영화라도 대신!
 
최범 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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