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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성소수자 고용차별 금지' 판결…"보수성향 대법관들의 반란"

중앙일보 2020.06.16 14:19
1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 위치한 연방대법원 앞에서 한 남성이 성소수자의 인권운동을 상징하는 무지개 색 깃발을 들고 감격해하고 있다. 이날 대법원은 성소수자의 고용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판결문을 냈다. [AFP=연합뉴스]

1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 위치한 연방대법원 앞에서 한 남성이 성소수자의 인권운동을 상징하는 무지개 색 깃발을 들고 감격해하고 있다. 이날 대법원은 성소수자의 고용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판결문을 냈다. [AFP=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법원이 게이와 트랜스젠더 등 성 소수자(LGBT)라는 이유로 해고하거나 직장에서 차별해선 안 된다는 판결을 15일(현지시간) 내렸다. 미 주요 언론들은 성 소수자 인권 보호의 분수령이 될 역사적 판결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민권법(1964년 제정) 7조 성차별 금지조항이 성 소수자에게도 확대 적용된 첫 사례이기 때문이다. 성 소수자의 성 정체성이 직장 내에서 여성, 남성과 같은 성으로 인정돼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민권법7조 성차별 금지, 성소수자로 확대
트럼프 지명 대법관에서 이탈표 나와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기념비적 판결"

 
대법원은 이날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해고한 고용주는 법을 위반한 것"이라며 "성 소수자도 민권법의 성차별 금지 조항의 보호를 받는다"고 판결했다. 이번 소송은 동성애자 남성 2명과 트랜스젠더 여성 1명이 실직 후 각각 제기한 소송을 병합한 것이다. 이들은 동성애자라고 밝혔다가 해고되거나 성전환 계획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며 각각 소송을 제기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미국 전체 주의 절반가량에서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해고하는 게 불법이 아니었다. 
 

보수성향 대법원의 '반란' 

LGBT 단체 회원들이 지난 2019년 10월 8일 미 연방대법원 앞에서 "성소수자란 이유로 고용 차별을 받아선 안된다"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LGBT 단체 회원들이 지난 2019년 10월 8일 미 연방대법원 앞에서 "성소수자란 이유로 고용 차별을 받아선 안된다"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번 판결은 트럼프 행정부 들어 대법원의 보수성향이 짙어졌다는 평가 속에서 나와 더 주목받고 있다. 현재 9명의 대법관 중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고서치 대법관을 포함해 5명이 보수, 4명이 진보 성향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 고서치 대법관을 포함해 보수 성향인 존 로버츠 대법원장까지 총 6명이 찬성 입장을 밝혔다. 다른 보수 성향 대법관 브랫 캐버노, 새뮤얼 앨리토, 클래런스 토머스 등 3명은 반대 의견을 냈다.  
 
판결문을 작성한 고서치 대법관은 "답은 분명하다. 고용주가 직원을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해고한다면 다른 직원들에게는 묻지 않았을 특성(성적 지향성)을 이유로 해고한 것"이라며 "성별이 해고 결정 과정에 역할을 하는 것은 정확히 민권법 제7조가 금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시했다. 반대 소수 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성 소수자들의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은 남녀 차별과는 다른 것이라는 입장을 냈다. 앨리토 대법관은 우선 법원 판결문이 각 용어의 범주를 모호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별'(sex)과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은 모두 다른 개념"이라며 "1964년 시민권법 논쟁 당시 성차별이라는 용어가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의미를 가질 가능성에 대해 논의된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앨리토 대법관은 또 "이번 판결로 종교의 자유·언론의 자유·개인 사생활 및 안전이 위협받을 것"이라며 반대 이유를 밝혔다. 성전환자가 화장실이나 라커룸을 이용할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에 대해 고서치 대법관은 "이번 판결은 해고와 고용 차별에 관한 것"이라며 "그런 문제는 향후 소송에서 해결하면 된다"고 반박했다.  
 

'한방' 맞은 트럼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라운드테이블 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라운드테이블 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판결에 대해 "매우 강력(very powerful)"하다며 "우리는 그들의 결정에 따라 살고 있다"고 짧게 말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오늘 이전까지는 절반 이상의 주에서 성 소수자들이 단순히 동성을 사랑하거나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바꿨다는 이유로 다음 날 직장에서 해고되는 상황을 겪었었다"며 적극적인 환영 입장을 냈다. 
 
일각에서는 이번 대법원 판결이 트럼프 행정부에 타격을 입힌 것으로 풀이했다. 전임자인 오바마 행정부 시절 연방 고용평등위원회는 민권법 7조의 성별에 따른 고용차별 금지 조항에 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을 포함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민권법 7조가 말하는 성별의 개념에는 성 정체성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18년 3월 트랜스젠더의 군복무를 금지하는 정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민권법은  

미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법으로 여겨지는 민권법은 1964년 제정됐다. 당시 민권운동의 상징이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존슨 대통령이 서명했다. 민권법은 인종과 피부색, 국적과 종교뿐만 아니라 성별에 근거해 고용주가 직원을 차별하는 것을 금지한다. 1955년 흑인 여성 로사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 양보를 거부했다가 체포된 사건이 계기가 됐다.  
 

미 대법원은 지난 2015년에는 동성 간 결혼을 합법화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NYT는 이번 판결이 당시보다 파장이 크다고 분석했다. 성 소수자들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AP는 미국 내 약 810만명의 LGBT 근로자가 이번 판결의 영향을 받게 됐다고 보도했다. 미국 내 성 소수자는 총 1130만명으로 추산된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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