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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상임위원장 단독 선출은 ‘4.13 호헌’ 1987년 이후 처음

중앙일보 2020.06.16 05:00

“여ㆍ야가 원 구성 협상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여당이 독단적으로 본회의를 열고 의장단과 상임위원장을 선출하는 것은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 이래 이번이 처음이다.”

 
15일 오전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는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1987년 민주화 체제를 만들어낸 민주당이 왜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국회 운영 관행으로 퇴행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주 원내대표의 주장은 단독 상임위원장 선출에 대한 비판이었다. 정확하게 따지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자유당이 집권하던 3대 국회(1954년 5월~1958년 5월)부터 12대 국회(1985년 4월~1988년 5월)까지는 국회 상임위원장 자리를 다수결에 의해 여당이 싹쓸이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여·야가 상임위원장 자리를 나눠 갖는 관행이 정착된 것은 87년 체제 이후인 13대 국회(1988년 5월~1992년 5월) 때부터다. 이후 20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여당이 단독으로 본회의를 열어 상임위원장을 선출한 사례는 없었다.  
 

국회 홈페이지에 나오는 공식 기록과 과거 보도 등을 종합하면, 1988년 이전 과반 의석을 점유한 여당만 본회의에 출석해 국회 상임위원장을 선출한 적은 총 4차례(7대 국회 전반기와 후반기, 8대 국회, 그리고 12대 국회 후반기)였다. 7대 국회 후반기는 전반기 파행의 연속선 상에 놓여 있다는 점, 8대 국회는 1972년 10월17일 유신(維新)으로 1년 3개월여 만에 해산돼 유명무실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현재 상황과 견주어 볼 만한 시기는 1967년 7대 국회 전반기 원 구성과 1987년 12대 국회 후반기 원 구성 때의 일이다. 물론 당시 여·야의 쟁점은 상임위원장 자리 배분 문제가 아니었다.  

 

1967년에 무슨 일이  

이효상 국회의장의 발언 모습. 중앙포토

이효상 국회의장의 발언 모습. 중앙포토

 

“정치인의 무능으로 인하여 국가와 국민에게 이 이상 더 손해를 끼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이유 여하는 고사하고 소수의 불참으로 인하여 다수의 의사가 무시되어야 한다는 것도 헌법정신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다.”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7년 10월5일 국회 본회의 속기록에 남아 있는 이효상 국회의장의 말이다. 이 의장은 이날 12건의 ‘상임위원장 선출의 건’을 상정했고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 의원들이 이 자리를 모두 차지했다. 공화당은 한 달 간격으로 치러진 대선(5월3일)과 총선(6월8일)을 모두 승리해 재적 175석 중 129석을 차지한 슈퍼 여당이었다.  

 

45석을 얻는 데 그친 신한민주당(신민당ㆍ총재 유진오)은 공개투표와 대리투표 사례가 드러난 6ㆍ8 총선을 “막걸리와 고무신 선거”라고 비난하며 의원 등록부터 거부했고, 총선 무효화를 위한 장외 투쟁에 나선 상태였다. 결국 이 의장은 신민당은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45명 신민당 의원 전원의 소속 상임위를 직권으로 배정한 뒤 상임위원장 선출 절차에 돌입했다.    
 

정치를 둘러싼 환경에도 유사한 점이 있었다. ▶사실상 슈퍼 여당과 제1야당의 양당 구도였다는 점▶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됐었다는 점▶전염병이 큰 사회적 이슈였다는 점 등이다. 당시에는 대중당이라는 1석짜리 원내 정당이 있었고, 지금도 정의당(6석)ㆍ열린민주당(3석)ㆍ국민의당(3석) 등의 군소 정당들은 원내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의석을 점유하고 있다. 1967년 여름엔 일본 뇌염 경보가 발령됐다. 속기록엔 공화당 재선 이백일 의원이 “요즘 사회면에 매일같이 점철되고 있는 뇌염 환자 수가 지금 2000명에 달하고 있지 않습니까”라며 전염병을 단독 개원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장면이 남아 있다.   
1967년 12월4일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가 국회 본의회에서 "이효상 국회의장은 단독 국회운영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1967년 12월4일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가 국회 본의회에서 "이효상 국회의장은 단독 국회운영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국회가 장기간 공전되면서 야당인 신민당 내부는 등원을 요구하는 ‘협상파’와 끝까지 장외 투쟁을 해야 한다는 ‘강경파’로 갈렸다. 그해 10월21일 '나홀로 등원'을 택한 김성용 의원은 "당리보다도 국리를 우선시켜야 하겠고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아니 될 때가 있다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남겼다. 다른 의원들은 그 한 달 뒤 공화당이 본격적으로 법안 단독처리에 나서자 등원했다.

 

1987년이 마지막 상임위원장 단독 선출  

 
87년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사제들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4.13호헌조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던 모습.

87년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사제들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4.13호헌조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던 모습.

유신 이후 전두환 대통령 재임기에도 야당은 늘 '여당 싹쓸이' 결과가 예정된 상임위원장 선출 표결에 참여했다. 다시 사달이 난 것은 1987년 5월 12대 국회 후반기 원 구성 때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4.13 호헌조치(護憲措置)를 하자 야당이던 민주당과 신민당은 ‘4ㆍ13조치 철회건의안’ 처리를 원 구성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 당시 민정당은 재적 274석 중 147석을 차지한 과반 여당이었고 옛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인사들이 만든 국민당(21석)까지 합치면 범여권 의석수가 168석에 달했다. 민주당과 신민당은 각각 67석과 28석에 불과했다.  

  
여ㆍ야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들은 국회의장 선출을 위한 본회의 전날인 5월11일 한 차례 회동했지만 ‘4ㆍ13조치 철회 건의안’을 두고 민정당과 야당은 접점을 찾지 못했다. 이튿날 범여 의원 170명이 출석한 가운데 이재형 국회의장이 선출됐고, 그 다음날 상임위원장 단독 선출이 마무리됐다.

직선제 개헌 투쟁으로 거리가 온통 화염병ㆍ최루타으로 뒤덮이던 87년 6월 항쟁 과정에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닭장차에 끌려들어가지 않기 위해 팔로 버티고 있다. 중앙포토

직선제 개헌 투쟁으로 거리가 온통 화염병ㆍ최루타으로 뒤덮이던 87년 6월 항쟁 과정에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닭장차에 끌려들어가지 않기 위해 팔로 버티고 있다. 중앙포토

  
민주당은 본회의 불참을 선언하며 낸 결의문에서 “국민적 합의인 민주개헌 의지를 유린한 4.13조치는 사실상의 독재 영속화 음모를 드러낸 것"이라고 주장했고 민정당은 “회기 말에 원 구성에 불참한다는 것은 의회주의 원칙에 정면 도전하고 정치 자체를 거부하는 행위”(김정남 대변인)라고 맞섰다.  

 
오현석ㆍ김홍범 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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