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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52억 시한폭탄, 압류신청된 日기업 국내자산 첫 확인

중앙일보 2020.06.16 05:00 종합 10면 지면보기
도미타 고지(富田浩司) 주한 일본 대사가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로 초치된 뒤 외교부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도미타 고지(富田浩司) 주한 일본 대사가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로 초치된 뒤 외교부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이달 3일 대구지법 포항지원이 일본제철의 국내 자산인 피앤알(PNR) 주식 압류 절차에 돌입한다는 내용을 공시 송달하면서 한·일 관계에 또 한 번의 소용돌이가 예고됐다.

[출구 없는 강제 징용, 시한폭탄된 한·일 관계 中]
후지코시강재 35억, 일본제철 9억…
강제징용 판결 관련 현금화 대상
피해자 21만명 중 현금보상 7만명
추가 소송 땐 “최소 3000억 필요”

 
해당 주식은 일본제철이 보유한 PNR의 지분에 해당하는 8만 1075주(약 4억 537만원 상당)로, 법원 결정에 따라 8월 4일부터 주식을 매각·처분하는 절차로 넘어가게 된다.
 
15일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이런 식으로 전국 법원에 압류 및 현금화 명령이 신청된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은 올해 초반 기준 총 52억 7000만원가량이다. 강제징용 사건과 관련한 전체 압류 규모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향후 한·일 관계가 ‘52억의 시한폭탄’에 달린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물론 이 자산들이 8월에 당장 처분되는 것은 아니고 매각에도 시간이 걸리지만, 양국 정부는 “현금화 시점이 머지않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일본제철은 PNR의 주식(액면가 5000원~7000원)을 대상으로 9억 7400만원이, 미쓰비시중공업은 특허권ㆍ상표권 등을 대상으로 8억 400만원 상당의 현금화 명령이 각각 신청됐다. 후지코시강재는 대법원 판결 전이지만 원고 측이 미리 가압류 신청을 했다. 대성나찌유압공업의 주식(액면가 1만원) 34억 9000여만원 상당이 해당한다. 
 
현재로썬 52억원이 상대적으로 큰 금액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강제징용 사건의 난제는 ‘미래 소송’에 있다. 지난해 국무총리실이 파악한 원고단은 약 990명으로, 문희상 전 국회의장실은 손해배상금 지급을 위해 최소 3000억원의 재원이 필요한 것으로 추산했다.
 
(사)일제강제동원희생자유가족협동조합 등 3개 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12월 서울 여의도 국회의장실을 방문, 문희상 국회의장이 대표 발의한 '일제 강제징용 피해 배상 기금 마련 법률안 통과 촉구 연대서명'을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일제강제동원희생자유가족협동조합 등 3개 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12월 서울 여의도 국회의장실을 방문, 문희상 국회의장이 대표 발의한 '일제 강제징용 피해 배상 기금 마련 법률안 통과 촉구 연대서명'을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 확정판결 3건을 제외하고 현재 대법원에만 9건이 계류 중이고, 20여 건이 서울·광주지법에서 진행되고 있다. 변호인단이 추가 소송을 추진하면서 원고는 점점 불어나고 있다.
 
여기에 소송 밖 피해자와 그 가족은 수만 명에 달한다. 2005~2008년 노무현 정부가 특별법 제정으로 피해를 인정한 강제징용 피해자는 21만 8639명으로, 이중 7만 2631명에게만 현금 보상이 이뤄졌다.
 
일본 측이 추가 소송에도 끝내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티면, ‘국내 자산 압류→강제 처분’의 악순환이 끝도 없이 반복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한·일 관계에 정통한 소식통들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현금화 시 보복 조치를 발동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고, 한국 정부도 이에 맞서겠다는 분위기다.
 
◇왜 이렇게 안 풀리나=강제징용 문제가 이처럼 심각한 상황에 이른 것은 양국 정부의 자존심 싸움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일본 기업의 배상은 절대 불가하다”고, 한국 정부도 “강제징용 문제는 사인(私人) 간의 소송이므로 국가가 관여할 수 없다”며 대법원 판결 이후 1년 6개월여 동안 힘겨루기를 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 외무성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상의 '외교 협의와 중재' 등의 절차를 여러 차례 한국 정부에 제안했지만, 외교부는 일절 답하지 않았다. 반대로 외교부가 지난해 6월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한ㆍ일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기금을 조성해 문제를 해결하자”(1+1안)고 제안했을 때는 일본이 거부했다.
 
이후 국회에서 입법으로 해결하자는 ‘문희상안’(11월), 재야에서 변호사ㆍ시민단체ㆍ학계 등이 참여하는 ‘민관 공동협의체안’(1월)이 나왔지만, 문희상안은 소송 원고 대리인단이, 민관 협의체안은 일본이 반대하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일본의 주장도 과거 사례를 보면 모순된다. 일본은 2015년 유네스코(UNESCO)에 군함도 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면서 공식 문건으로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한 적이 있다. 일본 법원의 판단으로도 2007년 니시마쓰 건설이 중국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화해 권고 결정을 내린 사례가 있다.
 
“사적 소송에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는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졌지만, 한편으로 사법 절차에 외교 문제를 종속시켰다는 평가가 있었다. 승패가 없는 외교 관계를 ‘자산 몰수’라는 강제 절차로 해결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강제징용 문희상 안에 대한 피해자, 시민사회단체 공동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지난해 11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강제징용 문희상 안에 대한 피해자, 시민사회단체 공동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2018년 대법원 판결의 요지는 “65년 한일 협정만으로 반인도 불법행위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을 국가가 쉽사리 소멸시킬 수 없다”는 내용이지만, 과거사 소송의 특성상 집행력을 담보하려면 국가의 개입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센터장은 “사법절차에는 정부가 개입할 수 없지만, 판결이 난 이후에는 정부가 양국관계가 파탄에 이르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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