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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의 시시각각] 대의를 독점하겠다는 오만

중앙일보 2020.06.16 00:41 종합 30면 지면보기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베이징 특파원 시절 중국 산시(山西)성의 깡시골 마을을 찾아간 적이 있다. 유명 위안부 활동가로부터 중국인 피해자 장셴투 할머니를 만나게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소개자 겸 통역으로 동행했다. 그는 이용수 할머니와의 만남을 주선하고 한·중 활동가끼리의 연대를 구축하고 싶어 했다.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없는 먼 길을 개인 경비를 들여 다녀온 것은 그의 일에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어서였다. 얼마 뒤 장 할머니가 숨지는 바람에 이용수 할머니와의 만남은 무산됐지만 중국인 활동가는 몇 차례 한국을 오갔고, 그때마다 나는 초청장 번역과 비자 수속을 대행해 줬다. 글머리에 이런 개인적 경험을 적는 건 위안부 운동의 ‘대의(大義)’를 부정하는 세력이 아님을 밝혀 오해를 막기 위해서다.
 

쓰지도, 반환도 못하는 일본 자금
전국민 윤미향 만들 생각 아니라면
정부가 해법 내고 결자해지해야

나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의 절대 다수가 위안부 운동의 대의에 찬동할 것이다. 30여 년 전 공개 거론조차 꺼리던 위안부 이슈가 지금까지 온 것도 따지고 보면 국민적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된 몇몇 이들은 그 대의를 독점하려 한다.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은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없었으면 위안부 문제가 교과서에 실리지도 못했다. 여러분들은 뭐 하고 있었는가. 책 한 권은 읽었을까”라고 했다. 회계를 챙기지 못한 터럭만큼의 불찰은 있을지언정 끼어들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건 참을 수 없다는 독선이다. 저금통을 갈라 성금을 낸 국민 지지로 위안부 운동이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안중에 없다. 무릇 사회운동에 종사하는 자가 갖춰야 할 품성으로선 한참 자격 미달이다.
 
‘토착 왜구’ 낙인은 코너에 몰릴 때마다 꺼내는 전가의 보도다. 윤미향은 “21대 총선은 한·일전”이라고 했다. 국가대표 전사를 응원은 못할망정 왜 발목을 잡느냐는 항변이다. 이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운 독선이다.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이 긴 침묵을 깨고 “위안부 운동 자체를 부정하고 대의를 손상시키려는 시도는 옳지 않다”고 했다. 진짜 대의를 훼손한 사람이 누구인지 대통령이 모르진 않을 것이다. 위안부 운동이 갖는 힘은 도덕적 우위와 정당성에서 나온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드러난 사람들이 하루빨리 위안부 문제에서 스스로 손을 떼거나 떼게 하는 것이야말로 대의를 지키는 길이다. 대통령은 엄정한 수사를 지시했어야 했다. 그런 말이 빠진 대통령의 발언은 “이쯤에서 그만하자”는 뜻과 비슷하게 들린다.
 
대통령 발언에서 빠진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겠다는 입장 표명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문 대통령은 2015년 한·일 정부 간 합의는 잘못된 것이라며 합의의 산물인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선언했다. 사실상 합의 백지화임에도 불구하고 “파기나 재협상 요구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후 대책 없이 백지화부터 덜컥 하고 나니 정부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져 버렸다. 이도 저도 못하는 딜레마 속에서 헌법재판소가 2011년 판결한 ‘부작위의 위헌’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뿐이 아니다. 일본 정부 출연금 10억 엔(약 108억원)도 문제가 된다. 화해치유재단은 해산 전 생존 할머니 47명 중 36명에게 1억원씩 주는 등 49억원을 지급했는데, 정부는 일본 자금이 아닌 우리 예산을 썼다고 설명한다. 일본 자금은 손도 안 대고 남아 있다는 얘기다. 합의를 지키려면 이 돈을 치유사업에 사용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반납해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일본과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하는데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에 도장을 찍은 일본이 응해 줄 리 만무하다. 설령 일본에 그런 마음이 있어도 지금의 한·일 관계론 어림도 없다.
 
이대로 방치하면 정부는 돈만 챙겨 금고 속에 모셔둔 격이 된다. 전 국민을 윤미향으로 만들 요량이 아니라면 정부가 해법을 내놔야 한다. 대의는 우리에게 있으니 하늘이 두 쪽 나도 문제없다는 셈법이 아니라면 말이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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