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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호의 법의 길 사람의 길] 기다림과 친숙해지면 좋겠다

중앙일보 2020.06.16 00:18 종합 28면 지면보기
문영호 변호사

문영호 변호사

스페인 땅을 처음 밟은 건 십수 년 전이다. 바르셀로나가 낳은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1852~1926)를 만나고 싶었다. 호텔에 짐을 푼 다음 날, 그가 남긴 건축물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성당)로 달려갔다. 서른한 살에 설계구상에 착수해 43년간 매달렸건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00년 가까이 중단을 거듭하면서도 공사가 진행 중이란다. 후임자의 손을 거치면서도 그의 꿈이 실현되기를 기다려 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공사 재개는
가우디에게 보내는 무한의 신뢰
기다림의 문화,믿음이 전제돼야

성당에 들어선 순간 거대한 규모야 예상한 대로였지만, 어쩐지 기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성스러운 분위기로 가라앉게 만드는 여느 성당과 다르게 느껴진 건, 독특한 건축양식이 주는 낯섦에 공사 중인 한쪽 켠의 어수선함이 겹쳐 그런지 모르겠다. 오직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성금만으로 지어진다는 설명을 듣고 보니, 숲속 키 큰 나무처럼 뻗어 천정을 떠받치는 기둥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모금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의 온갖 기원이 켜켜이 서려있어 그런 걸까.
 
그렇다. 그들의 기원이 가우디의 혼(魂)을 불러냈음이 분명하다. 천주(天主)를 향해 간절히 기도하면서, 꿈꿨던 건축물을 완성하라고 가우디를 불러내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 아닌가. 사후 100년 가깝도록 기다려주는 건, 건축가 가우디에게 무한의 신뢰를 보내는 거다. 그 날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신뢰로 쌓은 기다림의 금자탑으로 다가왔다.
 
기다림에 그렇게 익숙할 수도 있건만, 우리 주변에는 기다림을 불편해하며 피하려 하는 사람이 더 많다. 계절의 변화처럼 어김없이 오는 걸 기다릴 때도 조급해하거니와 올지 말지 알 수 없는 걸 기다릴 땐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좀처럼 오지 않는 행운을 기다릴 때는 애를 태우기 일쑤다. 맞닥뜨리기 싫은 일을 기다릴 때는 불안과 초조로 피를 말린다.
 
기다림과 친숙해질 수는 없을까. 거기서 기분 좋은 설렘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누구나 기다림을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손바닥만 하더라도 앞마당에 꽃을 가꿔 보면 기다림이 설렘 가득한 이벤트가 된다. 추위에 떨며 봄이 언제 오나 손꼽다보면 어느새 언 땅속에서 수선화가 얼굴을 내밀고 이어서 히야신스·튤립이 핀다. 드디어 봄이 온 거다. 그러다 목단·작약 등이 피면 봄은 멀리 달아나고 있다. 3월 하순부터 두 달 동안은 설렘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기다림의 축제에 빠질 수 있다.
 
경계해야 할 기다림도 있다. 탐욕과 만나 허황해진 기다림이 그렇다. 한 번 빠지면 좀처럼 헤쳐 나오지 못할 만큼 끈질기다. 인생역전의 한방을 노리다 파탄을 맞는 투기꾼이나 도박꾼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끝내 절망과 회한으로 마감할 게 뻔한데도 당장에는 스릴의 짜릿함에 현혹되는 걸까.
 
기다림이 한편의 드라마가 될 때도 있다. 간절함과 지성(至誠)으로 채워진 기다림이 극적 반전을 불러올 때다. 오랜 무명생활을 이겨내고 대스타가 된 연예인, 몇 차례 낙선 끝에 배지를 단 국회의원, 7전 8기로 낙방의 터널에서 벗어난 고시 합격생 등이 그 주인공이다. 거듭된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것이 믿고 기다려준 사람들에겐 더 큰 감동을 줬고, 본인에겐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혹독한 담금질이 되었을 거다. 허송세월이 숙성(熟成)의 시간으로 바뀌는 전화위복이 연출된 것이다.
 
기다림으로 경쟁하는 사람도 있다. 갈고닦은 숙성의 내공(內功)을 뽐내며 수백 년 동안 와인을 빚어 마신 유럽 사람들이 그렇다. 길고 짧은 숙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경쟁한 그들 덕분에 와인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숙성을 매직 수준으로 끌어올린 와인 메이커도 있다. 이름난 산지의 경우 생산 와인이 수백 종 넘지만, 같은 밭에서 키운 포도로 같은 방식으로 빚어도 빈티지(포도생산연도)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해마다 기후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두 해 오크통 숙성을 거친 후 병입(甁入)된 상태의 숙성이 수십 년 더 보태진다면 보존 기간에 따른 맛과 향의 다양성은 거의 무한대로 확장된다. 전 세계 매니아의 코와 혀를 사로잡는 와인의 매력은 한 마디로 기다림의 매직이다.
 
그들이 부럽다. 오랜 세월 좋은 와인을 빚으며 기다림에 익숙해졌고, 그 속에서 기다림이 문화가 된 것이 부럽다. 기다림은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믿고 기다려줬기에 사그라다 파밀리아 같은 건축물도 가질 수 있었던 거다. 믿고 기다려주니 가우디가 보답하는 것처럼, 건축물 하나가 수많은 관광객을 바르셀로나로 끌어들이고 있다. ‘빨리빨리’만 강조하며 살아온 우리도, 이제는 수십 년 믿고 기다려줄 만큼 기다림과 친숙해지면 좋겠다.
 
문영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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