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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기본이 안 된 기본소득 논쟁

중앙일보 2020.06.16 00:16 종합 25면 지면보기
서경호 경제에디터

서경호 경제에디터

282억원. 지난 10일까지 긴급재난지원금 기부금액이다. 당초 ‘제2의 금모으기 운동’을 거론하며 당정이 기대했던 2조8000억원의 1% 수준이다. 아무리 관(官)이 모범을 보인다고 민(民)이 무작정 따라가지는 않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우쭈쭈 하면서 반쯤 자락 깔고 하는 기부엔 아무도 춤추지 않았다. 영리한 고래는 칭찬의 가격을 냉정하게 따졌다.
 

기본소득 중장기적 검토 대상일뿐
‘지금 당장 도입’ 주장은 경계해야
재원·사회실험 등 기본부터 다지자

긴급재난지원금 덕분에 확실히 뜬 게 하나 있다. 기본소득이다. 색깔은 달라도 기본적으로 찬성하는 이들은 여야와 보수·진보를 넘나든다. 기본소득이 걸어온 길을 보면 그럴 법하다.
 
기본소득 구상은 500년 전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든 사람에게 약간의 생계수단을 제공’해서 빈자의 경미한 절도죄를 예방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자는 취지였다. 이는 계몽주의 사상가 토머스 페인이나 공상적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 등을 거쳐 자유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에까지 이어졌고, 20세기 들어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보수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등으로 면면히 이어진다. (복거일 등 공저, 『기본소득 논란의 두 얼굴』)
 
최근에는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으로 기존 일자리가 빠르게 해체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사회안전망의 일환으로 기본소득이 다시 조명됐다. 한때 미국 대선 민주당 경선에 나섰던 앤드루 양이 18세 이상 미국인에 월 1000달러의 보편적 기본소득을 주자는 공약으로 인기를 끌었다.
 
진보 쪽에선 낙인 효과 없이 인간의 최소 생활을 보장하는 복지의 궁극적인 확대라는 점에서, 보수 쪽에선 기존 복지제도의 효율적인 개혁과 사회안전망 확보 차원에서 기본소득에 관심을 표한다.
 
서소문 포럼 6/16

서소문 포럼 6/16

국내의 기본소득 논쟁을 보면서 떠오르는 몇 가지 단상을 정리했다. 첫째, 기본소득을 중장기적으로 논의할 필요는 있다. 경제사학자 로버트 고든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는 “진짜 큰 혁신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고 했다. AI가 몰고 올 일자리 충격은 미리 대비해야 한다. 산업혁명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중간 수준의 제조업 일자리가 늘어나 기술 혁신으로 일자리가 사라지는 충격을 완화해줄 것 같지는 않아서다.
 
둘째, ‘당장’ 도입하자는 주장은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 현실성도 없고 소모적 논란만 부른다. 전 국민 고용보험부터 확대하자는 의견(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약자 보호의 취지에도 맞고 합리적이다.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느냐가 중요하다. 전 국민에게 매달 10만원씩 준다 해도 연간 60조원이 필요하다. 기존 복지제도를 손대지 말자는 주장(이재명 경기지사)은 포퓰리즘이다. 재난지원금의 달콤함을 맛본 표심을 노리겠다는 것이다. 이재명 지사는 첫해엔 연 20만원(월 1만6700원)으로 시작해 연 50만원(월 4만원)까지 점차 올리고 증세를 통해 연 600만원으로 올리는 그림을 그렸다. 일단 예산으로 시작하고 나중에 국토보유세를 만들어 증세하자는 것인데, 여당 안에서도 충분한 재원 대책이 못 된다는 비판이 나온다.
 
셋째, 국가의 미래를 고민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중요하다. 민간단체 랩2050의 월 30만원 기본소득제나 밀턴 프리드먼이 주장했던 음의 소득세(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안심소득제( 『기본소득 논란의 두 얼굴』 저자,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은 기존 현금성 복지를 전부 혹은 부분 폐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 복지혜택을 누리는 이들이 강력하게 반발할 것이다. 한번 시작된 복지를 거둬들이긴 매우 힘들다. 기존 복지를 줄이거나 없애는 대신에 저소득층에 보조금(음의 소득세)을 주겠다는 논리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설계하고 설파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증세도 마찬가지다. 현금 받는 건 좋아해도 제 돈 내기는 선뜻 내키지 않는 게 보통 사람 마음이다. 복지를 더 누리려면 누군가는 지갑에서 더 꺼내야 한다는, 인기 없는 얘기를 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지도자다.
 
넷째, 사회 실험을 통해 제대로 작동할지 따져야 한다. 기본소득처럼 어마어마한 재원이 투입되는 사업에는 이른바 ‘증거에 기반한 정책 수립’이 필수적이다.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이 실패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있는 것처럼 실험을 해도 반드시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대상 가구의 99.5%가 받아간 이번 재난지원금 14조원의 소비 진작 효과부터 잘 따져봤으면 한다.
 
서경호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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