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신화의 한반도평화워치] 한·미 동맹이 굳건해야 북한에 농락당하지 않는다

중앙일보 2020.06.16 00:11 종합 23면 지면보기

강대국과 완충지대 국가의 논리

1950년 9월 15일 미군과 한국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상륙작전 2주 만에 서울 수복에 성공했다. 한국전쟁 이후 한·미 동맹은 북한의 전쟁 도발을 억제하는 확실한 억제책 역할을 했다. [중앙포토]

1950년 9월 15일 미군과 한국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상륙작전 2주 만에 서울 수복에 성공했다. 한국전쟁 이후 한·미 동맹은 북한의 전쟁 도발을 억제하는 확실한 억제책 역할을 했다. [중앙포토]

1, 2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의 중립화 시도는 실패했다. 자체 군사력이 약했을 뿐 아니라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놓인 이 완충국(buffer state)이 다른 열강에 이용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믿을만한 강대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믿을만한 동맹이 없는 완충국의 비애는 동서고금을 통해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거세진 미·중 갈등서 한국은 ‘진실의 순간’ 강요받아
전략적 모호성은 미·중 어디로부터도 신뢰받지 못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안보태세 갖추는 게 절실한 상황
한·미 동맹 강화는 북한 전쟁 도발의 확실한 억제책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을 견제하려던 일본이나, 1885년 거문도사건을 일으키며 러시아 견제에 나선 영국이 외친 ‘조선 중립화’는 진정한 한반도 중립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경쟁국 견제를 위한 방편이었다. 청나라 힘을 빌려 일본을 억제하고, 일본 견제를 위해 러시아 도움을 청하며 전전긍긍하던 고종은 1904년 영세중립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한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의 한국 병합만 가속했다. 1945년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통치도 어느 한쪽이 완충지대인 한반도를 독점 지배하는 것을 견제하려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이 지정학적 완충국을 다룬 방법은 중립국 지위를 유지하거나, 분할 통제하거나, 전쟁에서 승리한 강대국이 점령하는 식이었다. 어떤 방식이 되었든 분명한 것은 강대국들의 정치적 거래나 각축전의 결과에 따라 완충국의 운명이 결정됐다는 점이다. 국제 관계의 냉혹한 현실에서 완충국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믿을만한 동맹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복기해보면 분명해진다.
  
믿을만한 동맹이 다자간 약속보다 낫다
 
김일성이 ‘남침 허가’를 받기 위해 스탈린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49년 3월이었다. 미국 개입을 우려한 스탈린은 당시 남침을 단호히 거절했으나 이듬해 4월 승인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북한발 6·25 전쟁이 시작됐다. 1년 새 스탈린의 마음을 바꿀만한 상황들이 생겼다. 1949년 8월 소련 핵 실험 성공으로 미국의 핵 독점 시대가 끝났다. 그해 10월 중국이 공산화됐으며, 1950년 1월 미국은 동아시아방위선(애치슨라인)에서 한반도를 제외했다. 또 남한 내 인민군을 크게 환영할 친북 세력이 충분하다는 김일성의 설득도 먹혀들었다. 이 중 “한국의 안보는 유엔 책임 아래 두고 미국은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라는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의 선언은 스탈린의 오판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의 신속한 군사적 개입 결심은 유엔군 참전으로 이어졌다. 한국전쟁을 민주주의에 대한 공산주의 도전이라 단정하고 저지해야 한다는 트루먼의 결정이 단호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완충국들의 사례처럼 강대국들의 셈법이 우리 운명을 가름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상대로 미·일 동맹 수준의 양자 동맹을 요구·관철한 것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관계에서 믿을만한 동맹 하나가 수많은 다자간 약속보다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대통령의 업적과 과오에 대해서는 상충하는 역사적 평가가 많지만, 한·미 동맹이 북한 전쟁 도발의 직접적 억제책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 우리도 커진 국력만큼이나 ‘한·미 동맹의 신성화’에서 벗어나 미·중 강대국 간 균형 잡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은 지당한 논리다. 코로나19 대처 과정에서 방역 강국으로 조명받으면서, 이제는 미·중 택일 프레임에 갇힐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코로나 특수’는 한시적일 뿐이다. 거세진 미·중 갈등 속에 ‘진실의 순간’을 강요받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과 협력한다)식 전략적 모호성이 미·중 어느 한쪽으로부터도 확실한 신뢰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핵심은 국익과 정체성·가치관에 기반을 둔 원칙에 따라 어떤 전략적 선택을 할 것이냐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트럼피즘, 코로나 사태, 인종주의 등으로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휘청대고 있지만, 코로나 이후 세계는 탈중국화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믿을만한 파트너들과 글로벌 공급망을 다시 짜겠다며 신경제동맹 구상인 ‘경제번영네트워크’(EPN)에 한국 참여를 요청했다. 세계 무역과 제조업 패러다임이 재편되는 시기에 이 네트워크에 안정적으로 들어가는 것은 한국 경제의 건전성과 성장성을 위해 중요하다. 이는 또 전통적 안보 측면에서 믿을만한 동맹과의 관계 유지와도 불가분하다.
 
물론 미국의 ‘중국 때리기’에 편입하는 것은 신중함이 필요하다. 여전히 중국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파장뿐 아니라, 미·중 갈등 격화 속에 중·러 밀월관계가 가시화하면서 한반도는 이미 신냉전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전쟁 없는 평화의 한반도 만들기
 
우리에게 북풍은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 된 지 오래고, ‘반공(反共)보다 반일(反日)의 뉴노멀’이 정치판 최대 전략이 된 때문일까? 우리 정권은 아무리 북한이 ‘남조선 것들’이라고 신랄히 비난해도 그들의 요구조건만 들어주면 남북관계가 개선되리라 믿고 싶은 듯하다. 북한은 군사 도발을 들먹이는데 범여권은 한반도 종전선언을 촉구하고, 일부 진보 시민단체는 현 위기를 미국의 간섭 때문이라며 한·미 예속 동맹 폐기를 외치고 있다.
 
올해 문재인 대통령은 4·3 희생자 국가추념식(72주년), 광주민주화운동(40주년), 6·10 민주항쟁(33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희생자 배·보상과 철저한 진상 규명을 약속했다. “독립·호국·민주 영령들이 각자 시대가 요구하는 애국을 실천하였다”라는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가 마음에 와 닿는다. “두 번 다시 전쟁 없는 평화의 한반도를 만드는 것은 국민이 부여한 국가의 책무”라는 말에도 십분 공감한다.
 
이제 열흘이 채 안 남은 한국전쟁 70주년 기념식에서 취임 이후 3년 연속 불참했던 대통령의 모습을 보기 원한다. 비장한 모습으로 ‘족벌 3세’ 북한 지도층에 더는 농락당하지 않고 굳건한 동맹을 토대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안보태세를 갖추겠다는 대통령의 기념사가 듣고 싶다.  
 
벨기에의 외교 방황과 중립화 실패의 교훈
중립화 실패

중립화 실패

1839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벨기에는 75년 넘게 중립을 유지하다 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 점령당했고, 2차 세계대전 때도 동일한 비극을 겪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중립도 힘이 있어야 한다”며 벨기에가 무장 중립정책을 지향한 스위스와 달리 스스로 방위력을 키우지 못해서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소국 벨기에의 하드 파워(군사력과 경제력)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폐쇄적인 산악지형의 스위스와는 달리 오랜 앙숙지간인 독일·프랑스 사이에 낀 개방적 지형을 고려할 때, 두 강대국 다툼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것은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의문이 드는 것은 벨기에가 지정학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오랜 기간 중립국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냐이다. 그 이유는 당시 패권국이던 영국에서 찾을 수 있다. 루이 14세부터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까지 세력을 뻗어가는 프랑스를 위협으로 인식한 영국이 완충국 벨기에의 중립과 안보를 보장하는 외교정책을 선택한 것이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지만,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지 않은 이유는 두 강국 모두 벨기에를 건드림으로써 영국을 도발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1871년 통일을 이루고 세력을 확대한 독일은 영국 패권에 도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혹은 오판)이 생겼다. 1914년 8월 독일은 프랑스로 가는 길목인 벨기에를 먼저 침공했다. 이어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침범한 이유로 독일에 선전포고했지만, 영국의 개입은 벨기에 수호라기보다는 독일의 유럽 패권 야욕 저지가 목적이었다.
 
전후 벨기에는 패전국 독일로부터 영토적·경제적 배상을 받아내고자 중립 대신 프랑스와의 군사 협력을 택하였으나 프랑스는 영국처럼 안전 보장을 해줄 역량이 없었다. 더욱이 영국은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우려해 영·프 동맹 대신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을 취하는 치명적 오판으로 독일의 재무장을 초래했다. 이에 벨기에는 다시 중립을 선언했지만, 1·2차 세계대전 사이 20년 동안 벨기에의 ‘외교 방황’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의한 재점령으로 이어졌다.
 
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소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