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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먹을 땐 요사 떨더니"···평화 상징 평양냉면의 '독한 변신'

중앙일보 2020.06.15 05:00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9월 19일 평양 옥류관에서 열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오찬에서 평양냉면으로 식사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9월 19일 평양 옥류관에서 열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오찬에서 평양냉면으로 식사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평화의 상징은 이제 비둘기가 아니라 평양냉면이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당시 양국 정상의 오찬 메뉴였던 평양냉면에 대해 영국 매체 가디언이 내린 평가다. 그러나 평양냉면은 애초에 논쟁적 음식이다.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월북작가 김남천은 “항상 애끊는 향수같이 엄습하여 마음을 괴롭히는 식욕의 대상은 우선 냉면”이라고 예찬했지만, 소설가 이효석은 “육수 그릇을 대하면 그 멀겋고 멋없는 꼴에 처음에는 구역이 난다”고 평가절하했다. 요즘도 평양냉면은 밍밍해서 못먹겠다는 사람들과 바로 그 밍밍한 맛에 중독됐다는 애호가들 사이에 논쟁이 끊이질 않는다.
 
평양냉면의 정치적 의미도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됐다. 평화의 상징이 된 지 불과 2년 2개월 만에 다시 갈등과 비난의 소재로 전락한 것이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방문한 옥류관

 
최근 시작된 ‘냉면 논쟁’의 포문을 연 것은 오수봉 옥류관 주방장이다. 그는 북한의 대외선전 매체 ‘조선의 오늘’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평양에 와서 이름난 옥류관 국수를 처먹을 때는 그 무슨 큰일이나 칠 것처럼 요사를 떨고 돌아가서는 지금까지 전혀 한 일도 없다”고 막말을 퍼부었다.
 
옥류관 건물 앞 전경. [뉴스1]

옥류관 건물 앞 전경. [뉴스1]

 
옥류관은 남북관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1960년 8월에 문을 연 옥류관은 평양 대동강 옥류교 인근에 있다. 음식점 이름도 옥류교에서 따왔다. 전체 면적이 6000㎡에 달하며, 본관은 2층짜리 한옥양식의 건물이다. 본관과 별관을 합치면 2000석이 넘는 규모다. 가장 유명한 메뉴는 평양냉면이며 고기쟁반국수, 대동강 숭어국 등도 판매한다.

 
옥류관은 규모뿐 아니라 명성에서도 북한을 대표하는 음식점이다. 북한 고위 간부들의 연회와 외국 주요 인사의 접대 장소로도 이용된다. 한국 대통령도 3명이나 이곳을 찾았다. 우선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옥류관에서 오찬을 했고, 2007년 남북정상회담 때 평양을 찾은 노무현 전 대통령도 수행원들과 함께 이곳에서 오찬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때 “정상회담 만찬 음식으로 옥류관 평양냉면이 좋겠다”고 제안해, 북측이 옥류관 수석요리사와 제면기를 판문점으로 파견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 19일 평양 옥류관에서 오찬을 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 19일 평양 옥류관에서 오찬을 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어렵사리 평양에서부터 평양냉면을 가져왔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편한 맘으로 좀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문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한 2018년 9월 19일에도 옥류관에서 김 국무위원장 내외와 오찬을 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제가 늘 먹어왔던 평양냉면의 맛의 극대치”라고 말했다.

 

평화 상징에서 막말·비판 소재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옥류관의 평양냉면은 남북 평화의 상징물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CNN은 판문점 정상상회담 당시 “‘냉면 외교(noodle diplomacy)’에 대해 알아보겠다”며 옥류관 평양냉면을 소개했고, 여름이 오기도 전에 서울의 평양냉면 전문점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러나 남북 간 화해 분위기는 계속되지 않았고, 평화라는 수식어를 단 평양냉면의 위상도 불과 2년여만에 흔들리고 있다. 사실 조짐은 처음부터 있었다. 2018년 9월 평양 정상회담에 특별수행원으로 따라간 재계 총수들을 향해 리선권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장(현 외무상)이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고 말한 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다.

 
옥류관 평양냉면. [평양 조선신보=연합뉴스]

옥류관 평양냉면. [평양 조선신보=연합뉴스]

 
미북간 핵협상이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리선권의 막말은 오수봉 주방장의 막말로 발전했다. 국내에서도 냉면 논쟁이 뜨겁다. 김은혜 통합당 대변인은 13일 논평에서 “평화를 내세운 냉면도 공짜가 아니었다”며 “제재든 국제사회 시선이든 관계없이 대한민국이 냉면값을 지불하라는 속셈이 내재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연일 여당 인사들을 저격하고 있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도 ‘오수봉 발언’을 거론하며 “상스러운 폭언으로 남조선 절대 존엄을 모독했는데, 온몸으로 각하를 지키던 청와대 전ㆍ현직 참모들이 한마디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날 냉면이 맛이 없었다든지, 옥류관 냉면이 대단하다는 생각은 당신들 뇌피셜이라든지, 박수 좀 쳐 줬더니 정은이가 꽃을 다 꺾었다든지”라고 비꼬았다.
 
문재인 대통령 평양 방문 특별수행원으로 방북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이 2018년 9월 19일 오후 평양 옥류관에서 열린 오찬에서 리선권 조국평화통일 위원장 등 북측 인사들과 식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 평양 방문 특별수행원으로 방북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이 2018년 9월 19일 오후 평양 옥류관에서 열린 오찬에서 리선권 조국평화통일 위원장 등 북측 인사들과 식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평양냉면이 다시 평화의 상징이 될지는 불투명하다. 북한이 옥류관 주방장을 대남 막말공세에 동원한 것은 북한 정권이 남북관계에서 평양냉면의 함의를 잘 꿰뚫고 있다는 방증이다. 어쨌든 평양냉면의 정치적 위상은 위태로운 지경이 됐지만, 날이 급속히 더워지면서 전국의 평양냉면 집들은 때이른 대목을 노릴수 있게 됐다.
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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