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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선] 100년의 기억, 100년의 전쟁

중앙일보 2020.06.15 00:21 종합 28면 지면보기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꼭 20년 전 오늘이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1945년 광복 이후 남북 최고 지도자가 직접 만나서 발표한 첫 선언이었다. 평화통일과 이산가족 문제 해결, 남북한 교류 등 5개 항목에 도장을 찍었다.

프랑스 감독이 본 격변의 한반도
최근 쏟아지는 북한의 비방 공세
‘단군신화’ 곰처럼 우직한 대응을

 
20년 지난 지금, 한반도 주변 기상도는 캄캄하기만 하다. 미·중 극한 대립에 이어 북한은 연일 한국을 향해 비난·협박 공세를 퍼붓고 있다. 남북 통신선을 끊어버리고, 군사적 행동까지 예고했다. 20년 전 남북공동선언은 둘째 치고 2년 전 상호비방 중단을 합의한 판문점 선언도 휴짓조각이 될 처지다. 대북전단 살포를 둘러싼 우리 내부 갈등도 최고조에 달했다. 평화통일이란 단어를 꺼내는 것 자체가 우물에서 숭늉을 찾거나,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꼴이 됐다.

 
철 지난 얘기 같지만 20년 전으로 되돌아가 본다. 2000년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통일 과정이 얼마나 걸릴 것으로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김 대통령은 “남북이 진정으로 협력하면 10년에서 20년 후”라고 대답했다. 김 위원장의 생각은 달랐다. “40년에서 50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대화 문구만 보면 김 대통령이 틀린 셈이다. 2020년 현재, 통일은 여전히 요원하다. ‘남북이 진정으로 협력하면’이란 단서가 달렸지만 말이다.

 
이 에피소드는 임동원 당시 국가정보원장이 공개한 것이다. 지난 11일 소규모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백년의 기억’에 등장한다. 프랑스 출신의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수아 감독은 남북을 부지런히 오가며 양쪽 주요 인사를 인터뷰하고,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자료를 더해 남북한의 어제와 오늘을 훑었다. 이른바 ‘제3의 시선’으로 격동의 100년 세월을 균형감 있게 보여준다. 감독은 한국은 15번, 북한은 8번 방문했다고 한다.

 
‘백년의 기억’은 어찌 보면 새롭지 않다. 웬만한 한국인이라면 익숙한 내용이 많다. 한국을 잘 모르는 유럽 관객을 의식했기 때문일 수 있다. 112분 제한된 화면 안에 20세기 남북한의 권력 부침과 요동치는 국제 정세를 담다 보니 정보량이 많고, 전개 속도가 빠른 편이다. 우리 입장에서도 참고할 대목이 적지 않다. 특히 북한 사회에 대한 북한 고위간부들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예컨대 리통섭 북한 기록영상 감독은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배가 고파서 풀뿌리를 캐 먹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었다. 자식의 고사리손을 보는 부모의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김정일 시대 선군정치의 어두운 측면이다. 리종혁 조국통일연구원장은 “90년대 동유럽 사회주의 진영의 좌절로 북한은 자력갱생 의지를 더욱 굳게 다지게 됐다”고 전했다. 서방세력에 저항해온 집단적 조직력의 붕괴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을 거론했다.

 
‘백년의 기억’의 영어 원제는 ‘한반도, 백년의 전쟁’(Korea, A hundred years of war)이다. 분단과 전쟁, 대립과 반목의 역사를 따라가며 남북한의 차이점·공통점을 보여준다. 한국전쟁 70주년을 맞는 올해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한반도에 관심을 갖게 됐다. 편집의 마법에 불과하더라도 영화에서는 남과 북이 서로 대화를 나눈다. 이 영화가 DMZ 위에 작은 다리를 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감독의 소회도 경청할 만하다.

 
프랑수아 감독은 영화 들머리에서 단군을 보여준다. 평양 인근의 단군왕릉과 서울 사직단의 단군성전을 병치했다. 남북 공동의 뿌리로 단군을 주목했다. 19세기 말 국난 시기에 단군신화가 부상한 연유도 언급했다. 하지만 단군을 보는 남북의 서로 다른 눈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기자도 14년 전 평양 단군왕릉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체제 정당화를 위한 거대 피라미드형 석조물 앞에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감독이 영화 마디마디에 배치한 태권도 품새도 남북 사이에 아직 합의된 된 게 없다.

 
통합은 차이를 전제로 한다. 남북한 당국자의 목소리를 비등하게 배치한 외국 영화가 극장에 걸린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내부의 역량과 자신감이 쌓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금 눈앞의 한반도는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졌지만, 이 또한 더 큰 내일을 위한 진통이라고 생각하면 진정 백일몽에 불과한 것일까. 특정 시점이 아닌 역사라는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도량이 요청되는 요즘이다. 조변석개하는 북한의 전술에 엄정하게 대처하면서 말이다. 단군신화의 승자는 조급한 호랑이가 아닌 우직한 곰이었다. 프랑스 감독도 무려 10년을 들여 작품을 완성했는데, 당사자인 우리가 순간순간 희비에 휘둘릴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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