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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직’ 팻말 몸에 묶은 남자, 궁핍한 시대가 만든 명작

중앙일보 2020.06.15 00:03 종합 18면 지면보기
임응식 은 전쟁을 겪은 후 아름다움을 좇던 사진가에서 벗어나 현실을 생생하게 기록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사진은 ‘구직’(서울, 1953). [사진 임응식사진아카이브]

임응식 은 전쟁을 겪은 후 아름다움을 좇던 사진가에서 벗어나 현실을 생생하게 기록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사진은 ‘구직’(서울, 1953). [사진 임응식사진아카이브]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젊은 남자가 ‘求職(구직)’이라 쓰인 팻말을 허리춤에 묶고 벽에 기대어 서 있다. 그의 등 뒤로 번듯한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악수하고 있다. 1953년 명동 거리 풍경이다. 누구나 한 번쯤 봤음 직한 이 사진은 ‘한국 사진의 선구자, 태두’ 임응식(1912~2001·사진)의 대표작 ‘구직’이다.
 

‘한국 사진의 선구자’ 임응식
‘부산에서 서울로’ 52점 전시
1946~60년 명동·서면 등 풍경

최연하 사진평론가는 이 사진을 가리켜 “궁핍한 시대가 탄생시킨 명작”이라고 했다. “군더더기 없는 구도와 인물의 자연스러운 포즈”로 전후 실업자가 넘쳐나던 현실을 생생하게, 또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다. 임응식이 1957년 서울 청계천에서 찍은 ‘청계천 사람들’ 역시 1950년대 빈곤한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개천 양쪽으론 판잣집들이 빼곡하고, 개천 안쪽으로 꽂아 둔 엉성한 메뉴판엔 설농탕 100환, 백반 150환 등이 적혔다. 오래전 눈 밝은 사진가가 발로 뛰어다니며 렌즈로 낚아챈 이 순간들이 지난 50여년간 한국 사회가 겪은 변화를 말없이 증언한다.
 
‘명동 부감’(서울, 1954). [사진 임응식사진아카이브]

‘명동 부감’(서울, 1954). [사진 임응식사진아카이브]

한국 1세대 리얼리즘 사진가 임응식의 사진전 ‘부산에서 서울로’가 서울 강남역 인근 사진·미술 대안공간 SPACE 22에서 열리고 있다. 그가 부산에서 활동한 1946년부터 서울에 정착한 1960년 이전까지의 작품 52점을 모은 자리다. 임응식의 작품세계를 정리한 사진집  『부산에서 서울로』(이안북스)도 함께 출판됐다.
 
1912년 부산에서 태어난 임응식은 일본 와세다 중학교 입학 선물로 카메라를 받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1933년 일본인 중심으로 결성된 부산여광사진구락부에 가입하고 1934년 일본 사진 잡지인 ‘사진 살롱’에 출품한 작품이 입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그는 일본 도시마체신학교를 졸업한 뒤 강릉·부산 체신국에서 근무하며 사진 작업을 이어갔다. 1944~46년 일본물리탐광주식회사에서 과학 사진을 찍었고, 1946년부터 부산에서 사진현상소 ‘아르스(ARS)’를 운영했다.
 
‘아침’(부산, 1946). [사진 임응식사진아카이브]

‘아침’(부산, 1946). [사진 임응식사진아카이브]

사진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사진에 관한 한 ‘최초’ 타이틀을 줄줄이 보유하고 있다. 1952년 12월 한국 사진작가협회를 창립했고, 1953년 국내 사진가로는 처음으로 서울대 미대에서 사진강좌를 맡았다. 이후 그는 1974~78년 중앙대 사진과 교수를 역임했다. 198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연 최초의 사진작가이다. 2011년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그의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열렸다.
 
서정적이고 형식미에 중점을 둔 사진으로 시작한 임응식은 전쟁 이후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을 추구하며,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는 사진가로서 자신의 임무는 “아름다운 대상을 찍는 게 아니라 역사의 현장을 기록해 남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들이’(서울, 1954). [사진 임응식사진아카이브]

‘나들이’(서울, 1954). [사진 임응식사진아카이브]

임응식은 당시 사회에 감돌던 역동적인 공기도 놓치지 않았다. 1946년 부산 서면에서 찍은 ‘아침’은 댕기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소녀 셋이 아침 햇살을 흠뻑 받으며 꽃 광주리를 이고 걸어가는 활기찬 모습이다. 최연하 평론가는 “이번 전시는 전쟁 당시와 후, 부산과 서울의 거칠고, 소란스럽고, 위태롭고, 어지러운 풍경이 담겨있다”고 전했다.
 
임응식. [사진 임응식사진아카이브]

임응식. [사진 임응식사진아카이브]

1950년대 명동과 을지로, 장충동 등 서울 거리의 사진도 눈여겨볼 만하다. 중절모를 쓴 신사와 여인(‘연인’, 1955), 멋쟁이 여성들과 그녀들을 태우는 올드카(‘명동 여인들2’, 1955) 등이 옛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명동 거리를 내려다보고 찍은 ‘명동 부감’(1954)은 거대한 영화 세트처럼 보인다.
 
“찍고, 찍고 또 찍어도 한없이 찍고 싶다. 명동의 망령이라도 붙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다”고 쓴 임응식은 1950년대부터 200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명동 거리를 누볐다고 한다.
 
이번 전시와 사진집 출간은 임응식사진아카이브(대표 임상철)와 SPACE22 (대표 정진호). 그리고 이안북스(대표 김정은) 협업으로 이뤄졌다. 임상철 대표는 “지난 3년간 임 작가의 유품을 정리하며, 저의 할아버지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이자 사진가, 예술인으로서 더 존경하게 됐다”면서 “한국 사진계, 나아가 문화계에 남긴 유산의 가치를 재평가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시는 7월 9일까지(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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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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