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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밴 박수근 작품, 우리들 영혼 씻는 ‘빨래터’ 됐으면…

중앙선데이 2020.06.13 00:21 690호 25면 지면보기

『내 아버지 박수근』 펴낸 딸 박인숙 관장

박수근(1914∼1965)은 우리나라에서 그림 값이 가장 비싼 화가다. 2007년 5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빨래터’가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45억2000만원에 낙찰됐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가 최근 발표한 ‘KYS 미술품가격지수’에 따르면 지난해 거래된 박수근 작품의 호당(22.7×15.8㎝) 가격은 전년(2억1000만원)보다 16% 오른 2억3851만원으로 압도적인 1위였다. 2위 김환기(3490만원)와는 한참 차이가 난다.
 

양구 박수근어린이미술관 개관
아버지 그림엔 묵은 된장 빛깔
화폭 가득 따뜻한 심성 숨쉬어

부잣집 딸 어머니 보고 사랑앓이
결혼 뒤 한국전쟁, 극적 재회도
이젠 인성·감성 조화로운 교육을

박수근 화백의 장녀인 박인숙 선생(76·박수근미술관 명예관장)은 아버지의 정신을 지키고 기리는 일에 정성을 쏟아 왔다. 그는 최근 『내 아버지 박수근』(삼인)이라는 책을 냈다. 지난 5일 강원도 양구에 있는 박수근미술관 부설 박수근어린이미술관 개관식에서 박 선생을 만났다. 그는 미술 교사와 중학교 교장을 거쳤고, 은퇴 후엔 작품 활동과 함께 시니어 모델 일을 시작해 제2 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그림책·동화책 직접 만들어 준 따뜻함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에 있는 아버지 동상 옆에 나란히 선 박인숙 선생. 전민규 기자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에 있는 아버지 동상 옆에 나란히 선 박인숙 선생. 전민규 기자

박수근어린이미술관 개관에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그럼요. 저기 뒷동산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가 정말 행복해 하실 겁니다. 아버지는 말이 없어도 다정다감하셨어요. 어린 우리들을 위해 동화책을 만들고, 신문 오려서 소설책, 그림 오려서 미술책을 만들어 주신 분이죠. 우리도 자식을 키우지만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직접 몸으로 하기가 힘들잖아요. 전시된 내용들도 제 취향에 너무 잘 맞아서 제가 어린이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책을 통해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나요.
“아버지의 삶은 한 마디로 ‘자연’이라고 생각해요. 거짓도 없고 늘 그 자리에 있고…. 아버지가 그린 새를 보면 너무나 예뻐요. 근데 지금 세상은 얼마나 살벌한가요. 사람이 무섭지요. 언제 돌변할지도 모르고, 컴컴한 데서 사람 보면 화들짝 놀라게 되고요. 저는 박수근미술관과 이 책을 통해 우리 영혼이 빨래터처럼 세탁이 되고, 새처럼 아이처럼 되어서 사람 보면 반가운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아버님 그림 제목을 보면 형용사나 부사가 없고, 단순 명료한 명사로만 돼 있어요.
“아버지는 삼라만상을 따뜻한 마음과 애정 어린 눈으로 보신 거 같아요. 내가 책을 보고 있으면 그걸 쓱쓱 그리시고, 엄마가 절구질하고 있는 걸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다가 그걸 또 그리시고. 동네 나가실 때마다 스케치북을 들고서 눈에 들어오는 모든 장면들을 그리셨어요. 아버지 그림에는 체에 거르고 거른 색들이 모여 있어요. 색깔들이 겹치고 겹쳐서 오래 묵은 된장 같은 색이 나타나는 겁니다. 아버지 그림 앞에 서면 그림 속 아이들에게 ‘얘들아 지금 뭐 하냐’ 하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그런 소재·색깔·심성이 숨쉬니까 누가 돈을 들여 선전하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끌고 공감하는 힘이 나온 겁니다.”
 
서울 창신동 시절 부모님과 함께 한 단란한 한때. [중앙포토]

서울 창신동 시절 부모님과 함께 한 단란한 한때. [중앙포토]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 일제 사상검열에 걸려 집안이 풍비박산 난 뒤 5년간 춘천·포천·서울 일대를 떠돌며 겨우 생계를 잇는 그림쟁이로 살았다. 1936년 강원도 금성(현재 북한지역)에 다시 모인 박수근 가족의 바로 윗집이 천생연분 김복순의 집이었다.
 
윗집 처자를 훔쳐본 순간 사랑에 빠진 박수근은 절절한 연모의 편지를 보낸다. 큰 부자인 데다 괜찮은 혼처를 봐 놨던 김복순의 아버지는 ‘편지 사건’을 알아챈 뒤 딸을 흠씬 매질한다. 그 장면을 담 너머로 지켜본 박수근은 고통과 좌절로 병을 앓게 된다. 이에 박수근의 아버지가 윗집에 들이닥쳐 “내 아들 살려내라. 당신네 집안이 얼마나 잘났기에 사람을 이리 비참하게 무시하는 것이냐. 우리 아들이 아니면 당신 딸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으냐”며 소리소리 지른 뒤 그 자리에 드러누워 버린다.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고, 둘은 결혼한다. 평양과 금성을 오가며 살던 중에 한국전쟁이 터졌고, 박수근이 먼저 남쪽으로 피신하면서 기약 없는 생이별을 하게 된다. 김복순은 어린 것들과 젖먹이를 업고 걸리며 피난길에 올라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도착하고, 2년 만에 창신동에서 남편과 극적으로 상봉한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스토리다.
 
어린 시절 박인숙을 모델로 한 작품 ‘아기 업은 소녀’. [중앙포토]

어린 시절 박인숙을 모델로 한 작품 ‘아기 업은 소녀’. [중앙포토]

아버님과 어머님 사이는 어떠셨나요.
“두 분은 운명적으로 만났고, 아름다운 음악 연주처럼 사셨던 것 같아요. 서울에 정착한 뒤에 어머니가 머리도 좀 손질하고 퍼머도 하고 싶었대요. 그런데 아버지는 어머니가 늘 머리를 쪽지고 춘향이처럼 화장도 안한 맨얼굴로 지내는 걸 좋아하셨어요. 전차를 타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맨 구석으로 몰고 가서 아무도 접근 못하게 어머니를 꽉 막아섰대요. 아버지는 키가 1m80cm 넘고 얼굴도 이국적이라 동네 사람들 사이에 미국 사람과 산다고 소문이 났죠.”
  
아끼던 옛 도록 팔아 딸 등록금 마련도
 
만년에는 바가지도 긁고 그러지 않았나요.
“제가 공납금을 못 내 힘든 상황에서 어머니가 ‘인숙이 공납금 못 내면 학교 관둬야 한대요’ 했더니 아버지가 ‘그래? 걱정하지 마’ 하셨어요. 책장에서 아끼고 아끼시던 조선시대 도록 몇 권 싸서 나가시던 뒷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그걸 팔아서 공납금을 냈는데 어머니가 ‘왜 그러셨어요’ 하신 게 유일한 잔소리였죠.”
 
헤어지기 전 “박수근 정신을 계승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물었다. 박 선생은 교육자의 마음으로 말했다. “아이들 가치관이 많이 변했어요. 내가 좋으면 맞고 내가 안 좋으면 틀린 겁니다. 모든 게 내가 기준이 되는 거죠. 배려도 없고 참 무서워요. 지식 위주가 아니라 인성·감성·지식 교육을 조화시켜야 합니다. 서로 믿음이 오가는 사회를, 아버지 그림과 제 책을 통해 만들고 싶습니다.”
 
끊임 없는 위작 시비…“사람들 탐욕이 박수근 정신 훼손”
2008년 11월 위작 논란으로 감정을 받고 있는 ‘빨래터’. [중앙포토]

2008년 11월 위작 논란으로 감정을 받고 있는 ‘빨래터’. [중앙포토]

박수근의 작품은 워낙 고가다 보니 위작 시비도 끊임 없이 일어난다. 2007년 ‘빨래터’가 45억2000만원에 팔린 직후 미술 전문지 아트레이드가 위작 의혹을 제기했다. 서울옥션 측은 이 잡지사를 상대로 30억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2009년 11월 대법원은 “그림은 진품으로 추정된다”면서도 “잡지사의 배상 의무는 없다”는 묘한 판결을 내렸다.
 
아버지 작품을 한 점도 갖고 있지 않다는 박인숙 선생은 요즘도 “아버지 그림 좀 감정해 달라”고 가져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박 선생은 “그분들 눈을 보면 ‘진품이라고 얘기만 해 주면 최하 몇 억’이라는 생각이 꽉 차 있어요. 무서워서 위작이라는 말은 못 하고 ‘저는 이 그림이 좀 낯설어요. 감정협회 가셔서 여러 분들한테 감정을 받아 보세요’라고 말합니다”고 했다.
 
박 선생의 어머니는 주위 신세진 사람들에게 남편 작품을 많이 나눠줬다고 한다. 박 선생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앞이 캄캄했을 때 친지분들이 유작전을 몇 차례 열어줬어요. 다들 좋은 마음으로 싸게 작품들을 사 가셨죠”라고 설명했다.
 
박 선생은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아버지 그림이 사람들의 탐욕 때문에 싸움의 대상이 되는 게 가슴 아프다고 했다. “아버지 100주년 전시회 때도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작품의 가치와 박수근 정신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이건 몇 억짜리’ 얘길 하는데 참 서글펐어요.”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 / 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인터뷰 전문은 월간중앙 7월호 〈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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