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0년 전 한국전쟁 격전지 따라···한없이 평화로운 민통선 걷다

중앙일보 2020.06.11 06:00
강원도 양구 해안면은 한국전쟁 때부터 '펀치볼'로 불리었다. 미국 종군기자가 높은 산에 둘러싸인 마을 모양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펀치볼둘레길 '오유밭길' 코스를 걷다가 부부소나무전망대에서 마을을 내려다봤다.

강원도 양구 해안면은 한국전쟁 때부터 '펀치볼'로 불리었다. 미국 종군기자가 높은 산에 둘러싸인 마을 모양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펀치볼둘레길 '오유밭길' 코스를 걷다가 부부소나무전망대에서 마을을 내려다봤다.

올해는 한국전쟁 일흔 돌이다. 그러나 6·25 관련 행사나 ‘호국보훈의 달’ 포스터를 봐서는 70년 전 비극과 분단 현실이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차라리 휴전선 접경지를 여행하면 남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어디로 갈까. 지난해 정부가 의욕적으로 조성한 ‘DMZ 평화의길’은 아프리카돼지열병과 코로나19 여파로 전면 중단 상태다. 강원도 고성과 경기도 파주의 통일전망대도 잠정 폐쇄됐다. 강원도 양구 DMZ펀치볼둘레길이 훌륭한 대안이다. 펀치볼은 한국전쟁 격전지였는데 지금은 민통선 안쪽을 걷는 이색 트레일이자 천혜의 자연을 품은 생태관광지로 거듭났다. 지난 5일 둘레길을 걷고 왔다. 길은 한없이 평화로웠지만, 다시 남북 관계가 경색된 탓인지 걷는 내내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한산해진 펀치볼 마을

DMZ펀치볼둘레길은 산림청이 2011년 양구 해안면에 조성한 걷기 길이다. 펀치볼이 바로 해안면을 일컫는다. 한국전쟁 당시, 1100m가 넘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을 보고 미국 종군기자가 붙인 이름이다. 펀치볼은 큰 칵테일 잔이다.
펀치볼둘레길은 인터넷에서 예약한 뒤 숲길등산지도사와 함께 지정 탐방로만 걸어야 한다. 한국전쟁 당시 쓰인 기관총 탄피를 둘레길 안내판에 붙여둔 모습.

펀치볼둘레길은 인터넷에서 예약한 뒤 숲길등산지도사와 함께 지정 탐방로만 걸어야 한다. 한국전쟁 당시 쓰인 기관총 탄피를 둘레길 안내판에 붙여둔 모습.

둘레길은 개장 이후 줄곧 예약 탐방제를 유지했다. 탐방 기간은 2월 말부터 12월까지. 올해는 코로나 탓에 4월 22일에야 개방했다. 200명이었던 하루 탐방 인원을 5월 말까지 300명으로 늘리고 오후 탐방 코스도 추가했지만, 예년보다 부쩍 한산하다. 5월 31일까지 누적 탐방객은 1861명으로, 하루 평균 60명이 찾았다. 북부지방산림청 지장근 산림복지팀장은 “산악회 같은 단체 탐방객이 거의 없다”며 “둘레길이 한산해진 만큼 가족, 친구와 거리두기를 지키며 걷기엔 더 좋다”고 말했다.
휴전선 접경지대인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에는 아직도 지뢰가 많이 매설돼 있다. 산림청이 만든 정규 탐방로를 걸으면 안전하다.

휴전선 접경지대인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에는 아직도 지뢰가 많이 매설돼 있다. 산림청이 만든 정규 탐방로를 걸으면 안전하다.

예약제를 고수하는 건 안전문제 때문이다. 해안면은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이다. 미확인 지뢰지대가 많아 반드시 숲길등산지도사를 따라 지정된 트레일만 걸어야 한다. 종전 후 펀치볼에서 30여 명이 지뢰 사고를 당했다.
 
탐방로는 총 73.22㎞ 길이다. 4개 코스로 이뤄졌다. 계절마다 탐방객의 선호 코스가 다르다. 여름에는 숲길이 많은 ‘오유밭길’이 인기다. 지난 5일 오전 9시 30분, 출발점인 둘레길 안내센터에 10여명이 모여 몸을 풀었다.
 

쪽동백 향기 그득한 숲

오유밭길 코스는 해안면 오유리를 걷는 21.1㎞ 길이다. 처음 3~4㎞는 개천을 낀 그늘 없는 밭길이었다. 펀치볼의 명물 사과밭과 인삼밭이 펼쳐졌다. 뙤약볕에 뒷목이 따끔거렸다.
둘레길에서 만난 감자난초꽃. 멸종위기종이다.

둘레길에서 만난 감자난초꽃. 멸종위기종이다.

불두화와 병꽃나무꽃이 만개한 야생화공원을 지나 시커먼 숲으로 들어서자 계곡물 소리가 청아했다. 발 밑에는 감자난초꽃과 족도리풀꽃 같은 희귀 야생화가 수줍게 피었고, 머리 위에서는 쪽동백, 함박꽃나무가 짙은 향기를 내뿜었다. 박진용(67) 숲길등산지도사는 “야생화는 4월이 가장 화려한데 올해는 탐방객이 그때를 놓쳐 안타깝다”고 말했다.
 
출발 2시간여 만에 부부소나무전망대에 닿았다.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펀치볼보다는 큰 사발 모양 같았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분지라지만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 나오는 마을처럼 운석이 충돌해 푹 꺼진 듯했다. 가칠봉(1240m)과 북한 쪽 산등성이도 보였다. 1950년대에 해안면으로 이주했다는 김상범(71) 숲길등산지도사가 가칠봉을 가리키며 말했다.
탐방객이 북한 쪽을 가리키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가칠봉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탐방객이 북한 쪽을 가리키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가칠봉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어릴 적 동네 어른들에게 전쟁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요. 가칠봉에서 얼마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마을까지 흘러온 계곡물이 한참 동안 핏빛이었다더군요.”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던 펀치볼 전투는 1951년 9~10월에 걸쳐 40일간 이어졌다. 적군 2799명, 아군 428명이 목숨을 잃었다.
  

시래기·인삼… 펀치볼의 맛

와우산 자락에는 산림청이 조성한 자작나무 숲이 있다.

와우산 자락에는 산림청이 조성한 자작나무 숲이 있다.

약 5시간, 오유밭길을 탐방을 마쳤다. 대체로 완만했고 우거진 원시림이 대부분이어서 시원했다. 평화의숲길 코스 북쪽에 자리한 와우산(598m)도 가봤다. 원래는 민둥산이었는데 2000년 산림청이 잣나무, 자작나무를 심어 제법 울창해졌다. 자작나무숲 위쪽에는 우리 군이 만든 교통호와 벙커도 있었다. 여기서 북한까지 직선거리로 약 2㎞다. 박진용 숲길등산지도사는 “남북이 대북·대남 방송을 할 때는 늘 긴장이 감돌았는데 2년 전부터 고요해졌다”고 말했다. 
 
이날 펀치볼둘레길의 하이라이트는 독특한 마을 풍광도 두 눈이 환해지는 자작나무숲도 아니었다. 계곡가에서 먹은 ‘숲밥’이었다. 산림청이 해안면 주민과 함께 2015년 선보인 숲밥은 펀치볼의 명물이다. 탐방 일주일 전 신청하면, 주민들이 시간을 맞춰 준비해준다.
펀치볼둘레길에서는 마을 주민이 차려주는 숲밥을 맛볼 수 있다. 20인분 이상만 주문을 받는다.

펀치볼둘레길에서는 마을 주민이 차려주는 숲밥을 맛볼 수 있다. 20인분 이상만 주문을 받는다.

숲밥은 이름처럼 숲에서 나온 먹거리로 만든 밥이다. 이날은 펀치볼 특산물인 시래기, 인삼뿐 아니라 머위·우산나물·두릅까지 17가지 찬이 나왔다. 나물마다 색다른 향을 음미하며 먹으니 숲이 입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주민 윤은주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탐방 기간엔 거의 매일 주문이 들어왔다”며 “12명 단체인데 숲밥을 꼭 먹겠다며 20인분을 주문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숲밥에는 시래기된장국을 포함해 17가지 찬이 나왔다.

이날 숲밥에는 시래기된장국을 포함해 17가지 찬이 나왔다.

◇여행정보=서울시청에서 양구 해안면까지는 175㎞, 자동차로 2시간 30분 거리다. 탐방 예약은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사이트(komount.kr)에서 탐방 사흘 전까지 해야 한다. 월·화요일은 탐방 신청을 안 받는다. 예약비, 탐방 안내비는 따로 없다. 탐방객이 아무리 적어도 숲길등산지도사가 동행한다. 숲밥은 탐방 7일 전 20인분 이상 주문해야 한다. 1인 1만원.
 양구=글·사진 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