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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옷 만들 필요 없다"…'시즌 리스' 선언한 구찌의 개혁

중앙일보 2020.06.10 11:48
최근 럭셔리 패션 브랜드 '구찌'가 기존 시스템을 파괴하고 시즌리스(사계절의 구별이 없는) 방식으로 신제품 출시를 진행하겠다고 선언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지난달 24일(현지 시각) 브랜드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무방비 상태로 비탄에 빠진 현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반복해선 안 되는 과거를 고민해야 한다. 이 위기(코로나19)는 우리 모두를 본질적인 시험 앞에 서게 했다"며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그가 말하는 '변화'란 프리폴(초가을), 봄·여름, 가을·겨울, 리조트 룩 등 매년 계절에 맞춰 5번에 걸쳐 발표했던 신제품 출시 방식을 앞으로는 2번으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젠더리스(성중립)와 복고 트렌드를 유행시킨 구찌의 새로운 행보에 BOF·WWD 등 많은 외신은 앞다퉈 '구찌의 시즌리스'란 제목으로 이를 보도했다.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 사진 구찌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 사진 구찌

 

온라인 거래, 지속 가능성 고려한 새로운 혁신 시도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이번 발표에 업계가 반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전 세계 패션업계가 오랜 시간 관행적으로 전개해온 신제품 출시 방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채택하겠다는 일종의 개혁 선언이기 때문이다. 미켈레는 "이전 세계를 지배했던 사상의 도구들을 뒤에 남겨놓고 가려 한다. 그것들은 진부하고 모자란 단어들이다"라는 말로 새로운 의지를 확실히 했다.
패션 업계가 코로나19 이후 생존법을 고민하는 시점이라 더 관심이 모아진다. 더욱이 구찌는 영향력이 센 브랜드다. 세계 명품업계를 양분한 거대 그룹 '케어링'의 대표 브랜드면서, 발표 제품마다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다. 매년 명품 패션 업계 인기도를 발표하는 패션 매체 겸 온라인쇼핑몰 '리스트'에서 최근 몇 년 동안 '올해의 브랜드' '올해의 제품' 1위를 가장 많이 차지한 브랜드가 구찌였다.      
 
트렌드 분석가 이정민 대표(트렌드랩506)는 이번 구찌의 시즌리스 선언에 대해 "지금은 기존의 패션 시스템이 붕괴하는 시점"이라며 "코로나19를 기점으로 그간 느껴왔던 문제들을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쳤고 이에 구찌가 발 빠르게 대응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온라인 판매가 강력한 판매 수단이 되고, 시즌과 상관없이 조금씩 신제품을 출시하는 방식에 재미를 본 패션 브랜드들이 코로나19를 계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 이 대표는 "과거에는 브랜드를 알리는 방법이 옷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SNS·이벤트·매장 등 여러 방법으로 브랜드의 정체성과 지향성을 보여줄 수 있다. 수십 벌의 옷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컬렉션 방식의 비효율성을 버리고 각자에 맞는 신제품 출시 속도와 방식을 실행하려는 브랜드가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시즌리스 브랜드 '텐먼스'의 마스터핏 재킷과 바지를 입은 모델. 마스터핏 재킷은 1년 내내 계절과 상관없이 판매한다. 또 재킷 하나에 하의를 스커트, 와이드팬츠, 슬랙스 등 다양하게 구성해 자신의 취향과 스타일에 맞게 조합헤 입도록 착장을 구성했다. 사진 텐먼스

시즌리스 브랜드 '텐먼스'의 마스터핏 재킷과 바지를 입은 모델. 마스터핏 재킷은 1년 내내 계절과 상관없이 판매한다. 또 재킷 하나에 하의를 스커트, 와이드팬츠, 슬랙스 등 다양하게 구성해 자신의 취향과 스타일에 맞게 조합헤 입도록 착장을 구성했다. 사진 텐먼스

매달 혹은 정해진 기간에 적은 수의 아이템을 자주 출시하는 '드롭' 방식이 대표적이다. 젊은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스트리트 브랜드들이 주로 택하는 방법이다. 실제로 국내 패션 온라인 플랫폼 ‘W컨셉’에서 가장 잘 팔리는 브랜드 대부분이 베이직한 아이템에 기반한 시즌리스 브랜드들이다. 또 다른 패션 온라인 플랫폼 ‘하고’를 시작으로 W컨셉도 동참한 '펀딩'도 시즌리스 움직임 중 하나다. 사이트에 상품 정보를 올리고 소비자에게 먼저 주문을 받은 뒤 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불필요한 재고를 만들지 않는다는 게 장점이다.     
올해 초 신세계인터내셔널이 출시한 패션 브랜드 '텐먼스(10MONTH)'는 아예 '유행을 타지 않는' 시즌리스 콘셉트를 적용했다. 시즌별로 많은 제품을 새로 출시했다가 없애기를 반복하기보다, 10개월 동안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고 계절을 타는 옷은 조금씩 때에 맞춰 선보인다는 전략이다. 목민경 텐먼스 브랜드매니저는 "유행을 따른 옷은 그 시즌이 지나면 못 입는다. 시즌 개념을 없애면 오래 입을 수 있고 또 자주 입을 수 있다. 패션 용어로 '에센셜 아이템'이 되는 것"이라며 "브랜드와 소비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패션의 새 방향"이라고 말했다. 
구찌·프라다·발렌티노·몽클레르 등 유명 럭셔리 브랜드를 거친 디자이너 알렉산드라 파치네티는 올해 초 있었던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수많은 명품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를 거친 뒤 든 생각은 더는 트렌디한 옷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시즌리스 상품을 콘셉트로 정한 것은 패션 쓰레기를 양산하지 않는 측면에서 친환경적이고, 소비자에게는 쇼핑보다 더 중요한 라이프스타일에 시간과 힘을 쓸 수 있는 여유를 줄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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