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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대한민국 주류 교체와 두 파산

중앙일보 2020.06.10 00:34 종합 28면 지면보기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한국 사회에서 내전 중인 두 진영을 진보와 보수라고 부르는 게 타당할까? 혹은 좌파와 우파라고 부르는 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각각 진보·보수의 가치, 좌파·우파의 가치를 추구한다면 ‘내로남불’은 없을 것이다. 진보는 진보의 가치를 버린 국회의원 당선자를 당적을 막론하고 비판할 것이다. 우파는 표를 잃더라도 우파의 가치를 지키려 할 것이다.
 

헤게모니를 다툴 뿐인 두 세력
진보·보수라 일컫기 민망하니
신주류와 구주류라 불러주자

한데 한국 현실은 반대다. 두 집단이 모두 어제 주장한 것과 오늘 주장하는 것이 다르다. 거기에 부끄러움도 없는 듯하다. 가치를 추구하는 집단들이 아니니 진보-보수, 좌파-우파라는 명칭은 맞지 않는다. 그들이 일관성 있게 꾸준히 추구해 온 것은 가치나 사상이 아니라 헤게모니다. 그러니 대한민국 신주류와 구주류 정도로 부르면 적당하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두 집단은 무엇이 다른가. 나는 인재채용 방식이 가장 달랐다고 본다. 구주류는 주로 시험과 상속으로 구성원을 영입했다. 시험에는 사법고시·외무고시·행정고시가 있었고, 의사 자격증 시험이나 주요 언론사 입사시험, 몇몇 공채도 그에 준한다고 쳐줬다. 또 조부모나 부모가 커다란 부를 소유하고 있으면 해외 유학이라든가 후계자 수업을 통해 주류 사회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능력제와 세습제의 혼합이었다.
 
구주류의 채용 시험에 합격하기는 어려웠다. 합격자들이 헤게모니를 누리는 방식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이었다. 구주류는 시험과 상속이 아닌 다른 방식의 성공은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내부는 끈끈하고 어둡게 담합했고, 자주 카르텔이나 마피아에 비유됐다.
 
신주류의 채용 방식은 그보다는 열려 있었고 아스팔트에 가까웠다. 학생운동, 시민단체, 팟캐스트, 트위터로도 신주류에 합류할 수 있었다. 물론 구주류와 신주류의 자격을 다 갖춘 신인이 가장 환영받았다. 명문대 출신 시민운동가라든가, SNS 스타인 판·검사라든가.
 
부잣집에서 태어나지 않거나 ‘시험 머리’가 각별하지 않은 갑남을녀는 자연스럽게 구주류에 한을 품었다. 신주류가 훨씬 더 서민의 편 같았다. 그럼에도 구주류의 기득권이 두 세대 이상 이어져 온 것은 그들의 실력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적어도 시험을 통과한 놈들은 똑똑한 놈들이겠거니 하는.
 
그런 믿음은 지난 정부 때 산산이 깨졌다. 그 잘난 놈들이 모였다고 하는 정부와 여당, 명문대 교수들이 청와대를 들락거린 괴이쩍은 비선 실세의 변덕에 의문도 반론도 제기하지 못하고 꼬리를 흔들며 순종한 꼬락서니를 전 국민이 똑똑히 보았다. 배운 자들의 비판적 지성? 놀고 있네. 구주류는 파산했다. 재건하는데 시간 좀 걸릴 것이다.
 
반면 신주류에게는 늘 실력에 대한 의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말이 거친 술자리에서는 ‘근본 없는 놈들’이라는 업신여김도 당했다. 그럼에도 신주류에 대한 심정적 지지가 두 세대 이상 이어져 온 것은 그들의 도덕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서툴긴 해도 더 깨끗하고 더 정의롭겠거니 하는.
 
그런 믿음이 깨지는 모습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몇몇 인물의 부정 의혹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정당한 의혹 제기에 발끈해 뭐가 문제냐고 침을 튀기며 반발하는 신주류의 입들, 마땅한 비판에 되레 반동이라 욕하며 돌을 드는 핏발 선 눈들을 말하는 것이다. 도덕성을 묻는데 불법이 아니라고 반박할 때 그 도덕성은 파산 선고를 받는다.
 
두 진영은 파산할수록 점점 더 적대적 공생 관계가 되어 간다. 상대에 대한 비난 외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자신들만의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두 진영이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상대를 국민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고 진심으로 제거하려는 태도를 보면 모르는 것 같은데, 스스로를 비주류라 우기며 상대를 엄청난 힘을 지닌 음모 세력으로 몰아가는 걸 보면 아는 것 같기도 하다.
 
사회를 끌어갈 두 날개가 지적·도덕적으로 파산할 때, 그 사회도 파산한다. 가슴을 뛰게 해줄 새로운 가치를, 사상을 원한다. 당장 그럴 비전을 제시할 능력이 없다면 두 진영 선수들은 일관성을 지키는 노력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이익이 아니라 근거에 입각해 말하다 보면 경쟁이 건전해지고, 그러다 보면 현실을 보는 눈도 정확해지지 않을까. 정곡을 찌르는 현실 진단들이 쌓이면 미래에 대한 청사진도 점점 윤곽이 뚜렷해지지 않을까.
 
가냘픈 희망이지만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위험한 야심을 지닌 포퓰리스트들에게 점점 더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는 듯해 두렵다.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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