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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공포에 섬뜩, 좀비 영화같은 현실에 꼬집어봤다”

중앙일보 2020.06.10 00:03 종합 18면 지면보기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국내판 책 표지.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국내판 책 표지.

지난 8일 정오 대구시 중구 한 식당. 경북대 의대 이재태 교수와 대구시의사회 민복기 코로나19 대책본부장, 칠곡경북대병원 김미래 간호사 등 의료진 3명이 모였다. 6000명 이상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대구에서 사투를 벌인 대표 의료인들이다.
 

대구서 활동한 의료진 35인 고백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발간
동료의사 죽음, 감염에 대한 공포
꾸밈없이 일기 형식으로 글 엮어
일본서도 지난 6일 번역본 나와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이유는 코로나19와 싸우는 중에 느낀 생각 등을 언론에 알리기 위해서다. 지난달 중순 이들을 포함해 대구에서 활동한 35명의 의사·간호사들은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라는 책을 발간했다. 350페이지로 이뤄진 책엔 의료진들이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며 느낀 감염에 대한 공포, 무력함, 동료 의사 죽음을 지켜본 속내 등이 자세하게 담겨 있다.
 
일본판 표지.

일본판 표지.

이 자리엔 일본 후쿠오카(福岡)에 본사를 둔 서일본(西日本) 신문 가네다 다이(金田達依·39) 기자도 참석했다. 그는 “일본에도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 책이 나왔다. 코로나19 재유행이 우려되는 만큼 책에 나온 대구의 대처법 등을 의료진들에게 듣고, 일본에 전하기 위해 찾았다”고 했다.
 
『그곳에 희망을 심었네』는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일본에서 번역본과 전자책으로 각각 지난 6일과 지난달 20일 출판됐다. NHK, 아사히(朝日) 신문 등 일본 언론들도 앞다퉈 책을 소개했다.
 
책은 국내에선 지난달 15일 발간됐다. 페이스북에 국내 출판사에서 책 발간 예고 글을 올렸고, 이를 본 일본 ‘CUON’ 출판사 측에서 번역본 출판을 제안해오면서 일본에 책이 소개된 것이다.
 
어떤 내용일까. 일기를 엮어 놓은 것처럼 쓰인 책에는 과장이나 꾸밈이 없다.
 
늘 담담한 표정만 짓던 의료진들도 코로나19가 무서웠다. 엮은이로 책을 만든 이재태 경북대 의대 교수는 “코로나의 공포는 두려웠고 때로는 섬뜩했다”며 3월의 대구 상황을 기억했다. A병원장은 책에서 “2월 당시 코로나19 환자들은 물론 일부 의사들까지 코로나가 무서워서 덜덜 떨며 이성을 잃고 어지러운 상황이었다”고 했다. 정명희 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장은 지난 2월 선별 진료소 앞의 긴 줄을 보고 “좀비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현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꼬집어보기도 했다”고 적었다.
 
낡은 벨트는 민복기 코로나 19 대책본부장 벨트.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는 도중 체중이 줄어 벨트를 구겨서 착용하길 여러날 반복했더니, 벨트가 낡아버렸다고 한다. 김윤호 기자

낡은 벨트는 민복기 코로나 19 대책본부장 벨트.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는 도중 체중이 줄어 벨트를 구겨서 착용하길 여러날 반복했더니, 벨트가 낡아버렸다고 한다. 김윤호 기자

공포에 ‘줄행랑’을 놓은 것 같은 의사도 있었다고 책에 쓰여 있다. 이재태 교수는 “대구의 코로나 전장으로 보내진 전남 어느 군의 보건지소 근무 의사들이었다. 코로나19 환자 진료에 관한 교육 등을 마무리했으나, 저녁이 되자 모두 포기한다며 줄행랑을 놓은 것 같았다”며 3월 상황을 책에 담았다.
 
보호장비를 착용한 대구동산병원 의료진들. [뉴스1]

보호장비를 착용한 대구동산병원 의료진들. [뉴스1]

우주복 같은 레벨 D 방호복을 입고 있을 때의 답답함도 상세하게 담겼다. 이은주 칠곡경북대병원 음압중환자실 간호사는 “숨을 참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은 끝이 없었다. 찜질방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온몸의 땀 구멍이 한 번에 열리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했다. 박지원 칠곡경북대병원 63병동 간호사는 “방호복만 입었을 뿐인데도 가마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땀이 줄줄 흐르고 호흡이 가빴다”고 기억했다.
 
지난 2월 전국의 의료진들을 대구로 불러모은 출발점은 이성구 대구시의회 회장의 호소문이었다. 호소문이 작성되기 직전의 절박한 상황도 쓰였다. 이 회장은 책에서 “대구의 심각한 상황을 대구 5700여명의 의사에게 전하면 적어도 100명은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호소문을) 쓴 것”이라고 했다.
 
코로나19 상황이 대구에서 막 시작되기 시작한 2월. 그 첫 7일을 기록한 글도 있다. 민복기 대구시의사회 코로나19 대책본부장은 2월 17일부터 23일까지 상황을 썼다. 그는 “17일 대구엔 아직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18일 대구의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 그날 밤부터 19일까지 대구시장, 시청 공무원 등과 밤을 새워 상황 대처를 준비했다. 20일엔 국군대구병원장에게 연락해 병상 확보를 요청했다. 23일부턴 경증과 중증으로 분류해 새로운 치료센터 개념인 생활치료센터 도입을….”이라고 기록했다.
 
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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