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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5·18 망언만 처벌하자고?

중앙일보 2020.06.09 00:41 종합 30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2001년 알카에다의 뉴욕 세계무역센터 공격으로 3000명이 희생된 9·11 테러. 숱한 증거에도 이 사건에 대한 음모론은 끊이지 않는다. 여전히 ‘사전 인지설’ ‘미국 정부 자작설’ 등이 인터넷에 넘친다. 하지만 미 정부는 이를 처벌하지 않는다. 역사 왜곡을 막는 것보다 표현의 자유가 더 중하다고 믿는 까닭이다. 미 수정헌법 1조는 아예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도 만들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한국판 ‘홀로코스트 부정법’ 추진
‘표현의 자유’ 억압은 신중히 해야
다른 괴담은 놔두면 형평성 논란

여당이 한국판 홀로코스트 부정법을 만들 모양이다.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망언과 가짜뉴스가 판치는 걸 좌시할 수 없다는 거다. 독일·프랑스 등 16개 국가에서는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과 같은 반인륜 범죄를 부인하거나 축소·옹호하면 처벌한다. 이를 모델로 여당은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 개정안’을 지난 2월에 제출했다. 5·18과 관련해 “부인·비방·왜곡·날조 또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게 골자다.
 
5·18로 무고한 생명이 수없이 희생된 건 분명한 비극이다. 그럼에도 이 개정안이 적절한지는 여러 각도에서 짚어봐야 할 문제다.
 
첫째, 5·18 망언과 가짜뉴스 처벌이 헌법에 의해 보장된 표현의 자유까지 억압할 만큼 중요한가부터 따져야 한다. 미 헌법에서 보듯,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어떤 가치보다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명제는 누구도 거스르기 어렵다.
 
홀로코스트 부정법은 기본 사실을 부인하거나 축소할 때 처벌한다는 것도 결정적인 대목이다. 예컨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없었다” “희생자 수는 600만 명이 아닌 60만 명이다”고 우기는 경우만 해당한다. 반면에 가치 판단이 섞인 의견은 처벌하지 않는다. “5·18 시위자들은 무기고를 탈취한 폭도”라고 주장할 경우 주관적 의견이어서 처벌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하지만 여당 개정안은 사실 왜곡도 처벌 대상으로 삼는다. 현실에선 사실 부인과 의견을 두부 자르듯 나누긴 어렵다.
 
둘째, 형평성 문제도 크다. 수많은 사건으로 점철된 우리 역사에서 음모론은 한둘이 아니다. 북한 소행으로 밝혀진 천안함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문재인 대통령부터 “북한의 도발”이라고 여러 번 확인했음에도 천안함은 미국 또는 이스라엘 잠수함과 충돌해 침몰했다고 적잖은 진보 인사들이 주장한다. 따라서 한국판 홀로코스트 부정법을 만들려면 천안함 괴담, 6·25 북침설 등도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형평에 맞다. 독일의 역사 관련법은 홀로코스트 부정만 처벌하는 게 아니다. 패전 후 독일인들이 소련 등지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는 걸 부인해도 처벌하게 돼 있다.
 
셋째, 1990년대 중반 유럽에서 홀로코스트 부정법이 태어난 데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0여 년이 지나자 전쟁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신나치즘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로 학살당했던 유대인들이 다시 위기에 몰린 것이다. 게다가 유대인 생존자들이 줄면서 기존의 명예훼손죄로 홀로코스트 부정을 단죄하기 어려워졌다. 명예훼손은 친고죄인 탓이다. 이런 사정 탓에 독일 정부는 역사 부정에 관한 처벌 규정을 신설했던 거다. 요컨대 지금의 우리 상황에서 5·18 관련 망언을 처벌하겠다고 특별법을 개정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많은 전문가는 법이 역사학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건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역설한다. 학문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거짓된 주장은 역사적 진실로 맞서야 한다. 그래야 탈이 없다. 표현의 자유를 막아 특정한 역사관으로 몰아가는 건 권력의 횡포다. 79년 프랑스 문학자 로베르 포리송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자 각계로부터 공격받게 됐다. 그러자 한국 진보세력도 추앙하는 유대인 진보 지식인 놈 촘스키가 나서 이렇게 옹호한다. “나는 당신이 쓴 내용을 혐오하지만, 나는 당신이 계속 쓸 수 있도록 내 목숨을 걸겠노라”고.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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