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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칼럼니스트의 눈] 기본소득제는 뒤로 미루고 현장과 전문가에 다가가야

중앙일보 2020.06.09 00:37 종합 20면 지면보기

통합당이 비호감에서 벗어나려면

얼마 전 삼성그룹 사장에게 들은 이야기다. “삼성전자 30~40대 직원은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고액 연봉을 받는 축에 속한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 진보 여당에 70% 넘는 몰표를 던진 눈치다.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보면 주 52시간제의 약발이 통했다. 야간이나 주말 근무가 사라지면서 삶의 질이 몰라보게 좋아졌기 때문이다. 반면 보수 야당에 대해선 강남 부동산 부자 등 가진 자만 챙긴다며 외면한다. 콘텐트도 빈약한 ‘꼰대’들이 온갖 막말로 듣는 사람마저 부끄럽게 만든다고 비웃는다.”
 

비현실적 아마추어 구상 쏟아내
왜 진보 꽁무니만 뒤쫓고 있는가
보수에도 소중한 정치 자산 많아
전문가에게 식견과 지혜 구해야

김종인 통합당 비대위원장이 ‘기본소득제’를 들고나온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일 것이다. 보수 야당엔 비호감의 낙인이 단단히 박혔다. 이런 밉상 이미지를 뒤엎으려면 파격적인 극약처방을 피할 수 없다. 그는 박근혜 대선을 도울 때도 진보진영 어젠더였던 경제민주화를 선점하고 월 20만 원의 기초노령연금을 공약해 성공을 거뒀다. 요즘 김 위원장은 기본소득제의 밑밥을 던지는 데 열심이다. 거침없이 “약자와의 동행”을 외치고 “통합당이 진보보다 더 앞서가는 진취적인 정당이 되겠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통합당이 총선 패배 직후 기본소득제를 들고나온 것은 진정성을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공천 실패·막말·무능 등 진짜 참패 원인은 묻히고 재난지원금 때문에 졌다는 손쉬운 구실을 찾는 듯 비친다. 맹수에게 쫓기면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를 연상시킨다. 정말 돈 때문에 총선에서 졌다고 믿는다면 거꾸로 황교안 대표가 재난지원금을 “따따블”로 불렀다면 이길 수 있었다는 논리다. 이는 유권자에 대한 모독이다.
 
기본소득제 도입 여론조사

기본소득제 도입 여론조사

가장 근본적 문제인 재원에 대해 눈 감는 것도 꼼수로 비친다. 진보진영은 ‘증세 없는 기본소득도 가능하다’는 마법 같은 주문을 왼다. 기존 복지재원을 통폐합하면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1인당 30만원씩의 기본소득을 주려면 연간 180조원이 필요하다. 국민연금·실업급여 등 4대 보험은 손 안 대더라도 기초연금·근로장려금·아동수당 등은 폐지 수준의 수술이 불가피하다. 또한 모든 위기 다음에는 반드시 재정 위기가 찾아온다. 경제 붕괴를 막으려 돈을 쏟아부은 후유증이다. 리먼 사태 이후에도 2년 만에 그리스·스페인의 재정 위기가 덮쳤다. 시장은 냉혹하다. 이미 우리 재정은 3년 연속 초수퍼 예산에다 3차례 코로나 추경으로 얼마나 체력이 버텨줄지 의문이다.
 
진보 진영은 ‘복지가 곧 성장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보수 야당은 경제정책과 복지정책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코로나 사태로 전 세계가 금리를 내리고 엄청난 재정을 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엔 공통분모가 있다. 코로나 사태가 해소되면 언제든 되돌릴 수 있는 거시 정책만 동원한다는 점이다. 치료제·백신이 개발되면 언제든 금리를 올리고 재정 투입을 줄일 수 있는 가역적인 조치들이다. 이에 비해 기본소득은 경제와 복지를 구조적으로 뒤바꾸는 정책이다. 한번 도입하면 되돌아가기 어려운 비가역적 선택인 만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를 핑계로 덥석 도입할 제도가 아니다. 이미 한국 경제는 소득주도 성장의 생체 실험으로 복합골절 상태다. 이런 기저질환에 기본소득제까지 얹게 되면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떠안을 수 있다.
 
2018년 OECD, 선진국의 기본소득 실험에선 높인다고 경고

2018년 OECD, 선진국의 기본소득 실험에선 높인다고 경고

언젠가부터 통합당은 무능력한 아마추어 정당으로 전락했다. 산업화·선진화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전문가들이 두텁게 포진해 있지만 이들의 의견을 듣지 않은 지 오래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사업은 1~2개 성공모델을 만든 뒤 순차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바람에 두고두고 화를 불렀다. 박근혜 대통령은 ‘증세 없는 복지’ 논쟁을 보수의 분화·진화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리-배신의 프레임으로 싹을 잘라버렸다. 전문가들은 입을 닫았다.
 
지난 총선에서 통합당은 똑같은 패착을 범했다. 당시 홍남기 경제 부총리는 “상위 50%는 매달 100만원 이상 저축하기 때문에 재난 지원금을 줘도 소비 진작 효과가 낮다”며 이유 있는 고집을 부렸다. 재정 부담과 지원 대상의 선별 비용·정책 효과까지 모두 따진 가장 전문적인 의견이다. 그렇다면 황교안 대표는 홍 부총리의 50%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안을 지지했어야 했다. 오히려 통합당은 돈의 위력에 휘둘려 전 국민 1인당 50만원을 외치면서 민주당과 판돈 경쟁을 벌이다 스스로 무덤을 팠다.
 
기본소득제 해외 실패 사례 빈곤율

기본소득제 해외 실패 사례 빈곤율

기본소득제도 마찬가지다. 김 위원장이 화두를 던지자 곧바로 차기 대선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홍 부총리는 “우리 여건상 도입하기 적절치 않다”며 선을 그었다. 청와대와 정세균 국무총리도 “재원 조달 방안이 마련되지 않는 기본소득제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비현실적이라는 소리다.
 
냉정하게 말하면 기본소득은 보편 복지의 끝판왕이다. 현재 29%인 국민부담률(세금+사회보장 부담금)을 서유럽처럼 50% 수준으로 올리고 10%인 부가가치세율도 20% 선으로 끌어올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런 각오 없이 기본소득제를 고집하면 한없이 가벼워 보이고 국민적 불신만 자초할 뿐이다. 김 위원장도 뒤늦게 “기본소득을 당장 하자는 것은 아니다”며 “미래를 대비하자는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내심 기본소득 이슈를 보수 꼴통 이미지를 깨기 위한 충격 요법으로 삼는 눈치다. 그나마 다행이다.
 
문재인 정부는 ‘청와대 정부’라 불릴 만큼 진영 논리로 기울고 있다. 보수 야당이 이런 진보 프레임에 얹혀 가면 희망은 없다. 오히려 통합당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내려놓고 현장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는 것이다. 그래야 삼성전자 3040 직원들까지 고개를 끄덕일 현실적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
 
돌아보면 보수 쪽에도 귀중한 정치적 자산이 적지 않다. 이명박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 위기 극복 신화를 썼으며, 이는 코로나 방역 성공에 버금가는 위대한 업적이다. 그렇다면 당시 주역이던 윤증현·박재완 전 장관 등에게 현재의 위기 극복 방안을 묻고 지혜를 구하는 게 우선이지 왜 기본소득제 같은 이벤트성 신기루만 찾아 헤매는지 의문이다. 진보진영의 꽁무니만 따라다녀선 곤란하다. 기본소득제는 장기 숙제로 미뤄놓고 딱딱한 이념보다 전문적이고 현실적인 처방을 찾는 것이 보수 야당을 비호감의 늪에서 구원해 줄 것이다.
 
국제 싱크탱크들이 쏟아내는 비전통적 경제 처방
기본소득제 모델은 다양하다. 역사적으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단골 소재였지만 신자유주의 주창자인 밀턴 프리드먼의 기본소득 모델도 있다. 최저생계비에 모자라는 차액을 국가가 기계적으로 지원하면 기존의 비효율적인 복지 시스템을 싹 없애고 정부 개입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캐나다의 온타리오주, 핀란드, 스위스 등은 기존 복지를 축소하고 기본소득을 도입하려다 실패했다. 재정 부담도 문제였지만 서민층이 기존의 연금·사회보조금·양육수당·주택보조금 등을 받는 게 더 이득이라며 기본소득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본소득 논의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본산인 국제통화기금(IMF)도 2017년 기본소득 구상을 발표한 바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개발도상국에는 기본소득이 뚜렷한 효과를 내지만 복지 선진국에는 오히려 재정 부담과 불평등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국제 싱크탱크들은 앞다투어 파격적인 구상을 내놓고 있다. IMF는 블로그를 통해 코로나 사태의 처방전으로 예전 같으면 포퓰리즘으로 비판했을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대표적인 게 선택적 국유화다. 코로나로 사기업이 파산하거나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과감하게 국영화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격리로 소득이 감소하거나 궁지에 몰린 자영업자에겐 정부가 직접 현금을 뿌리는 것은 물론 실업수당·식권·상품 쿠폰 지급까지 불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과거 사회주의하에서 배급제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일시적 충격에서 기업과 일자리를 보호가 중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전대미문의 코로나 위기에 기축통화국을 중심으로 경제학 교과서에 없는 비(非) 전통적 금융·재정정책 구상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코로나 발(發) 경제학 빅뱅이다.  
 
JP모건은 최근 “일시적인 마이너스 금리가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민간 금융기관으로선 손해를 각오한 이례적인 제안이다. “1~2년씩 장기적으로 끌고 가지 않는 부드러운 마이너스 금리라면 그 효용이 사회적 비용을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이너스 금리로 한계에 몰린 많은 기업이 계속 생존하면 경제에 그만큼 부담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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