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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 잃은 황금거위 홍콩, 어부지리 싱가포르…갈 곳 잃은 자금 몰린다

중앙일보 2020.06.08 11:41
천안문사태 발생 31년이 된 지난 4일, 홍콩의 반중 시위대가 거리로 나섰다. 홍콩의 위기는 자금 유출로 이어지는 분위기다. 로이터=연합뉴스

천안문사태 발생 31년이 된 지난 4일, 홍콩의 반중 시위대가 거리로 나섰다. 홍콩의 위기는 자금 유출로 이어지는 분위기다. 로이터=연합뉴스

 
홍콩에서 갈 곳을 잃은 돈이 싱가포르로 향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중앙은행 격인 통화청(MAS)는 5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시중 은행에 유입된 자금이 최근 1년 사이에 4배로 뛰어 전년 대비 27억 싱가포르 달러(약 2조3345억원)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싱가포르 통화청은 이어 자국에 예치된 자금 중 비(非) 거주 예금주의 비율이 44%로 늘었다고 밝혔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에 대해 “홍콩의 자금이 싱가포르로 유입됐다”고 분석했다. 미ㆍ중 갈등의 첫 격전지가 된 홍콩에 불안감을 느낀 자금이 이웃 중화권 국가 싱가포르로 유입된 정황이 구체적 수치로 확인된 셈이다.
 
홍콩발 자금이 싱가포르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2019년 중반부터라고 FT는 전했다. 홍콩 국가보안법이 중요한 논란거리가 되기 이전인 지난해부터 홍콩의 반중(反中) 시위로 정국 불안이 가중되자 자금 유출이 서서히 시작됐던 셈이다. 여기에 홍콩 국가안보법이 결정타를 때렸다. 중국은 지난달 최대 국가 이벤트인 양회(兩會)에서 홍콩 국가안보법을 깜짝 통과시켰다. 미국은 홍콩에 부여했던 경제 혜택의 근간인 특별지위를 거두겠다고 응수했다. 8일 현재 미국은 특별지위 박탈을 실행하지는 않고 엄포만 놓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특별지위 박탈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상황에선 불안정성도 가중된다.  
 
싱가포르의 번화가. 싱가포르가 제2의 홍콩이 될 수 있을까. AFP=연합뉴스

싱가포르의 번화가. 싱가포르가 제2의 홍콩이 될 수 있을까. AFP=연합뉴스

 
홍콩과 함께 범중화권에 속하는 싱가포르가 홍콩의 대체재 후보로 고려된 건 새롭지 않다. 2004년부터 재임 중인 리셴룽(李顯龍) 총리의 탄탄함에서 비롯된 정치적 안정성과 언어 장벽이 없다는 게 싱가포르의 강점이다. 그럼에도 싱가포르는 지금까지 홍콩 사태의 어부지리를 누리고 있다는 인상을 최대한 주지 않으려 했다. FT는 “싱가포르는 라이벌(홍콩)의 어려움에서 이득을 취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며 “중국의 심사를 건드릴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싱가포르 통화청의 발표가 이목을 끌고 있다. 홍콩발 자금 유입을 싱가포르가 처음으로 공식 인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포천(Fortune)지는 6일(현지시간) “홍콩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서의 매력을 잃었다”며 “중국이 홍콩 안보법을 내걸고 나선 것은 그만큼 홍콩을 희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홍콩 내부에서 전하는 분위기는 차분한 편이다. 홍콩 현지 국제금융기구에 일하는 한 이코노미스트는 중앙일보에 “급격한 엑소더스(대탈출)가 감지되고 있지는 않다" 며 "지난해 (홍콩) 시위 사태를 거치면서 미리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마음의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6일자)에서 “홍콩이 지정학적 폭풍에 휩싸였다”며 “홍콩이 계속해서 국제 금융 센터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코노미스트는 홍콩에 대해 “변압기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표현했는데,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와 중국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최근 정국 불안 및 홍콩에 대한 중국의 그립이 확고해지면서 이런 ‘변압기’ 역할은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이를 두고 FTㆍ이코노미스트 등은 “홍콩의 중국화(Chinatization)”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HSBC 등 홍콩의 주요 기업과 기관, 금융 큰 손들이 홍콩 안보법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 이런 변화의 대표적 사례다. 커져만 가는 홍콩의 빈자리를 싱가포르가 치고 들어올 가능성이 짙어지고 있는 분위기다.  
 
홍콩 번화가의 한 상점에 걸린 '자유' 문구. 홍콩의 시스템은 점점 중국화되고 있으나 반중 정서 또한 높아지고 있다. AFP=연합뉴스

홍콩 번화가의 한 상점에 걸린 '자유' 문구. 홍콩의 시스템은 점점 중국화되고 있으나 반중 정서 또한 높아지고 있다. AFP=연합뉴스

 
한국 및 일본에 대해선 제2의 홍콩이 되기 어렵다는 시각이 뚜렷하다. 유명 경제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페섹은 7일 아시안타임스에 “한국과 일본은 홍콩을 대체할 수 없다”고 적었다. 일본에 대해 페섹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일본을 국제 금융 허브로 만들겠다고 나섰고, 세계 3위 경제대국으로서 일본의 포텐셜은 있다”면서도 “높은 법인세와 경직된 노동시장, 영어 소통의 어려움 등의 문제를 과감히 해결하지 않는다면 어렵다”고 적었다. 한국에 대해선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의 틈을 파고드는 게 현명하긴 하겠지만 일본의 문제점이 곧 한국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게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지적했다.  
 
싱가포르에 대해선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제 코가 석자'라는 지적도 나온다. 사진은 싱가포르의 상징인 멀라이언 인근이 코로나19로 인해 폐쇄된 모습. AFP=연합뉴스

싱가포르에 대해선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제 코가 석자'라는 지적도 나온다. 사진은 싱가포르의 상징인 멀라이언 인근이 코로나19로 인해 폐쇄된 모습. AFP=연합뉴스

 
그러나 싱가포르가 홍콩발 자금의 경유지가 될지 종착지로 남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싱가포르 역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리셴룽 총리는 7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코로나19 이후 싱가포르는 그 전과는 매우 다를 것”이라며 “실업률은 높아지고 세계 각국이 보호주의의 장벽을 높이는 가운데 더 어려운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싱가포르가 코로나19 이전처럼 국제 경제에 열려있는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게 어려울 수 있다”고 전했다. 홍콩을 대체하는 야심을 꿈꾸는 대신 자국의 코로나19 상처를 회복하는 데 당분간 집중해야 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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