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성택의 퍼스펙티브] 역사에 반복은 없다…그러나 반복되는 어리석음은 있다

중앙일보 2020.06.08 00:39 종합 23면 지면보기

코로나19와 정치문화

그라픽=최종윤

그라픽=최종윤

“역사는 생물학의 한 조각이다. 인간의 생명은 육지와 바다에서 유기체들이 겪는 온갖 우여곡절의 일부다.”
 

세계사 주도해온 미·영이 코로나19 사망자 1·2위 된 건
정치적 양극화와 망가진 정치문화, 지도자의 선동 때문
한국 정치문화도 막말과 선동, 편 가름의 진영 정치 득세
개선 없으면 절호의 기회 놓치고 실패한 국가로 돌아가

1968년 윌 듀란트가 부인 아리엘과 함께 저술한 명저 『역사의 교훈』의 한 구절이다. 바이러스가 인간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세계사를 주도해온 서구 강대국들이 코로나바이러스에 무너지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희생자 수에 있어 세계 1·2위를 기록하고 있다. 사망률은 각각 6.0%와 14.3%로, 한국의 2.4%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미·영 언론은 정치적 양극화와 망가진 정치문화(damaged political culture)를 방역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칼럼니스트 조지 팩커는 시사 월간지 애틀랜틱 6월호에 “우리는 실패한 국가에 살고 있다: 미국은 코로나바이러스로 무너진 것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그는 미국 사회가 오랫동안 방치된 기저 질환 상태에서 바이러스의 침입을 맞아 무너졌다고 진단한다. 부패한 정치, 융통성 없는 관료주의, 활기를 잃은 경제, 반목하는 시민들에 분열을 부추기는 트럼프류의 정치가 더해지면서 이미 무너지고 고장 난 시스템이 팬데믹을 맞아 드러났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가디언의 네스린 말릭도 5월 10일 자 칼럼에서 “영국과 미국이 세계 최대의 코로나바이러스 희생국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면서 양국 지도자의 선동적 정치행태로 인한 망가진 정치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한국인은 잘 생기고 명민하고 똑똑”
 
바이러스가 침입하기 전에 이미 망가진 정치로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는 지적은 우리에겐 시사적이다. 100여 년 전 ‘실패한 나라’를 살아야 했던 만해 한용운(1879~1944) 또한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이 망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자멸(自滅)이라고 했다. 그때의 침입자는 바이러스가 아닌 일본이었을 뿐이다.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1831~1904)은 1894년부터 1897년까지 한국을 네 차례 방문했다. 그 기간은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조선의 운명이 결정되는 주요 사건들이 일어났던 시기다. 비숍은 일본·러시아 등 열강이 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다투는 와중에 정치 엘리트의 분열과 만성화된 정치적 불안을 목격하면서 한국의 운명을 절망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에 대해서는 미래의 희망을 본다. 비숍은 중국인·일본인과 비교하면서 “잘 생기고” “대단히 명민하고 똑똑한 민족”이라고 평가하면서 “미래에 있을 이 나라의 더욱 큰 가능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1897년 1월 한국을 떠나면서 비숍은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운명을 놓고 서로 대결하는 상태에서 한국을 떠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는 표현으로 한국 정세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예감하고 있었다.
 
비숍의 관찰은 마치 예언처럼 실현됐다. 그의 예감대로 식민지라는 실패 국가를 겪었지만, 한국인은 그 경험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지금 한국은 세계 10위의 경제 강국일 뿐 아니라 문화·예술·스포츠 분야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은 아시아를 넘어 월드클래스다. 이번 코로나19 방역 성공으로 세계는 찬사와 함께 한국을 다시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망가진 정치 때문에 실패한 미국과 영국을 생각하면 한국의 방역 성공은 역설적이다. 망가진 정치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경우다.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이다. 우리는 바이러스와의 1차 전투에서 이겼을 뿐 전쟁에서 이긴 건 아니다. 팬데믹 이후 불확실한 세계를 생각하면 지금의 성공은 물거품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정치인들, 메아리 방 만들어 여론 청취라 우겨
 
한국의 정치문화도 미국과 영국 못지않게 망가져 있다. 막말과 선동, 편 가름의 진영 정치 가운데 사회적 현안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실종됐다. 지난 20대 국회는 파행과 교착의 식물국회, 때로는 동물국회로 4년을 마쳤다.
 
진영과 패거리 정치는 시민사회에서도 재현됐다. 조롱과 경멸의 폭력적 언어가 인터넷 공간의 상용어가 된 지 오래다. 인터넷 공간은 집단지성을 위한 공론장이 아니라 자아도취의 ‘메아리 방’, 에코 체임버(echo chamber)로 변질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만의 방을 만들어 여론 청취라 우기거나 서초동·광화문 혹은 여기저기 입맛에 맞는 ‘메아리 방’을 찾아다니면서 그것을 국민의 소리라고 주장한다.
 
정치는 메아리 방처럼 폐쇄된 격실에서 자아 도취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소리를 모아 아름다운 합창을 만들어 내는 지휘자의 일이다. 서로 다른 것들의 어울림이라는 점에서 합창의 화음과 정치의 화쟁은 다르지 않다.
 
윤회가 단지 반복되는 삶이 아니듯 역사에 반복은 없다. 그러나 반복되는 어리석음은 있다. 정치문화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21세기 번영하는 성공 국가로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흘려보내고 다시금 실패한 나라로 돌아갈 수도 있다. 21대 국회의 각성과 시민들의 책임이 막중하다.
  
대화는 ‘나의 옳음’ 유보하고 ‘타인의 옳음’ 숙고하는 것
코끼리

코끼리

7세기 동아시아 불교계는 백가쟁명 시대였다. 원효는 특정 학파의 입장을 지지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는 화쟁론을 제시했다. 서로 다른 주장을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로 바라봄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화쟁론에 등장하는 ‘장님과 코끼리’의 예화는 자신의 ‘앎과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님은 자신이 만진 것만을 코끼리라고 생각한다. 코끼리 다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고 주장하고 배를 만진 또 다른 장님은 ‘코끼리는 벽과 같다’고 주장한다.
 
에코 체임버 효과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21세기 버전이다. ‘닫힌 방’ 안에서 유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끼리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자신들이 믿는 바를 더욱 강화하고 증폭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자신들만의 방안에서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고 자신들의 메아리를 사실이라고 믿는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에코 체임버는 가짜뉴스를 만들고 확산하는 산실이며 확증편향과 정치 양극화의 주범이다.
 
화쟁의 현대적 의미는 대화와 소통이다. 진영 논리에 갇힌, 정치 평론가들의 입만으로는 결코 온전한 코끼리를 알 수 없다. 화쟁의 첫 출발은 ‘나의 코끼리만 코끼리’라는 주장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입을 닫고 귀를 여는 것이 대화의 시작이다. 대화란 ‘나의 옳음’을 잠시 유보하고 ‘타인의 옳음’에 대해 숙고하는 과정이며, 질문을 통해 차이의 본질을 이해하고 더 큰 ‘옳음’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화쟁은 단호함으로 포장된 독선적 정의(正義), ‘신념화된 정의’를 경계한다. 대화를 위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화쟁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이분법적 세계가 아니라 다원적·개방적 세계를 지향한다. 차이와 다양성을 긍정하고 대화와 질문을 통해 ‘더 큰 옳음’, 사회적 공동선을 모색하는 것이 화쟁의 정치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함께하는 경청 상임이사, 전 뉴욕주립대 교수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