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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으로 읽는 책] 권성민 『서울에 내 방 하나』

중앙일보 2020.06.08 00:07 종합 31면 지면보기
서울에 내 방 하나

서울에 내 방 하나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어가는 시간은 묘한 진공의 느낌을 준다. 머물던 땅을 벗어났지만 새로운 땅에는 아직 발을 딛지 않은 시간. 이제 내 시계는 떠나온 땅의 시간과는 맞지 않을 텐데, 아직 목적지의 시간에도 이르지 못했다. 이동 중인 비행기에는 시계를 맞출 현재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출발지 시간, 목적지 시간, 그리고 남은 비행 시간만이 존재할 뿐.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기묘한 진공 상태는 안정감을 준다.
 
권성민 『서울에 내 방 하나』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날아갈 때 종종 이런 느낌이 든다. 이제 비행기에서 내리면 새 삶이 펼쳐지리라, 과거의 나와는 결별하고 일상은 리셋되리라. 여행에 대한 기대와 흥분도 이런 것이다. 작가는 현실이 유예되고 멈춘 듯한 그 시간을 “기묘한 진공 상태”에 비견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시간의 무력감을 즐기다가, 착륙이 다가오면…진공의 시곗바늘을 한 걸음씩 틱틱틱틱 일상의 시간으로 옮긴다”라고 썼다.
 
지상파 예능PD 출신 작가의 에세이집이다. 그는 불안 장애에 시달리던 군 생활을 빨래에 몰두하며 벗어났다. “그렇게 빨래를 하다 보면, 손에 닿은 그 차가운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가운 물방울, 물을 먹은 섬유의 질감, 시린 손, 쪼그려 앉아 체중이 느껴지는 두 다리, 저려오는 발. 이런 사소한 것들이 느껴질 때 시간은 더 이상 수축하지 않았다. 생생한 감각 속에서 시간도 진짜로 느껴졌다.” 일상의 생생한 감각을 회복시켜주는, 구태의연하지 않은 글쓰기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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