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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방 갇혔다 숨진 소년, 한달 전 비극 막을 기회 있었다

중앙일보 2020.06.05 00:02 종합 14면 지면보기
계모에 의해 여행 가방에 감금돼 의식불명에 빠졌던 9살 A 군이 4일 천안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끝내 숨졌다. 사진은 지난 1일 119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는 A군과 구급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계모(오른쪽 노란색 옷). [연합뉴스]

계모에 의해 여행 가방에 감금돼 의식불명에 빠졌던 9살 A 군이 4일 천안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끝내 숨졌다. 사진은 지난 1일 119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는 A군과 구급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계모(오른쪽 노란색 옷). [연합뉴스]

또 한 명의 아이가 부모의 학대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1일 계모에 의해 여행용 가방에 7시간 동안 감금됐다가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던 A군(9)은 결국 이틀 만인 3일 사망했다. 이미 한 달 전에 학대 정황이 포착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막을 수 있었던 비극 아니냐”는 탄식이 나오고 있다.
 

어린이날 이마 찢어져 병원행
의사가 멍자국 보고 학대 신고

담당기관이 방문해 상담했지만
부모와 분리할 필요 없다고 판단

전문가 “아이 진술만 믿으면 곤란
지속적 학대 의심 땐 분리했어야”

4일 경찰에 따르면 계모 B씨(43)는“말을 듣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며 지난 1일 정오부터 오후 7시까지 A군을여행 가방에 감금했다. B씨는A군을 가로 50㎝, 세로 70㎝ 크기의 대형 여행 가방에 가뒀다가, 아이가 가방 안에서 용변을 보자 다시 가로 44㎝·세로 60㎝ 크기의 중형 여행 가방에 옮겨 감금했다. 119구급대가 A군을 발견한 건 중형 가방이었다. B씨는 A군을 가방 속에 감금한 상태에서 3시간가량 외출을 하기도 했다.
  
7시간 감금돼 심정지, 이틀 만에 사망
 
경찰 등에 따르면 A군은 지난해 1월부터 친부(44), B씨(43), B씨의 친자녀 2명과 충남 천안시 백석동의 한 아파트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계모가 데려온 자녀는 13세 누나와 10세 형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A군은 B씨를 ‘엄마’라고 부르며 따랐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참변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욱 키운 건 지난달에 이미 A군에 대한 학대 정황이 포착됐다는 점이다. A군은 어린이날인 지난달 5일 밤 순천향대 천안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의료진은 2.5㎝ 정도 찢어져 있었던 A군의 이마를 꿰맨 뒤 단독으로 면담했다. 그의 엉덩이와 손, 발에서 오래된 멍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B씨가 “욕실에서 넘어져 다쳤다”고 말했지만 아동 학대가 의심됐다.
 
의붓아들을 숨지게 한 40대 계모가 3일 영장실질 심사를 위해 천안지원으로 향하고 있다. [뉴스1]

의붓아들을 숨지게 한 40대 계모가 3일 영장실질 심사를 위해 천안지원으로 향하고 있다. [뉴스1]

병원 관계자는 “면담에서 A군이 맞았다는 얘기를 한 것으로 안다. 아이를 진찰한 교수는 B씨에게 ‘체벌은 좋지 않은 훈육 방법’이라고 말한 뒤 돌려보냈다”고 했다. 병원은 이튿날 학대아동위원회를 열어 A군 상처를 학대로 판단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도 지난달 8일 관할 충남아동보호전문기관(아보전)에 이 사실을 통보했다. 아보전은 학대 아동을 일시적으로 격리 보호하면서 부모의 친권 제한 및 상실을 시·도 지사에게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상흔 사진과 경찰 조사 내용, 의료진 의견 등을 전달받은 아보전은 “아이를 긴급하게 가정과 분리해야 할 만한 정황은 없다”고 판단했다.
 
아보전 관계자는 “상처를 사진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어서 학대의 심각성 여부를 판단하기 힘들었다”며 “가정도 방문해 아이를 부모와 분리한 채 독립된 공간에서 상담했는데, 아이가 부모에 대해 긍정적으로 진술했고 엄마와의 상호작용에도 특이점이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경찰은 A군과 B씨를 분리 조처하지 않기로 하고, 이들을 모니터링(관찰)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다만 아보전은 이후에도 추가 상담을 시도했으나 부모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을 이유로 가정 방문을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동학대 예방에 복지예산 1%도 안 써
 
전문가들은 “막을 수 있었던 참사”라며 안타까워했다. 장화정 아동권리보장원 학대예방사업부 본부장은 “초동 대처가 미흡했던 것 같다”며 “멍 자국이 있어 지속적인 학대 상황을 의심할 수 있었던 만큼, 아이를 부모로부터 분리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아이들은 학대를 받는 경우에도 부모와 같이 살고 싶다는 마음에 피해를 소극적으로 진술하거나 부인하곤 한다”며 “아이의 표현이 진심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학대당한 징후가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가정에 남겨둔 셈”이라며 “긴급보호조치를 해야 했다”고 강조했다. 긴급보호조치는 아동학대 현장에 출동한 아보전 직원이나 경찰이 아동을 학대행위자와 최대 72시간까지 격리해 보호하는 조치다. 아동학대 관련 예산을 늘릴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올해 아동학대 관련 예산은 297억원으로, 80조원이 넘는 전체 복지 예산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파트 주민들은 큰 충격에 빠진 모습이었다. 김모(30)씨는 “거의 매일 아기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왔지만, 얼굴에 멍이 든 아이를 본 적은 없는 것 같다”며 “숨진 아이가 집에서 거의 나오지 못했던 것 아닌가 싶어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아이가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감을 느꼈을 것 같다”며 “놀이를 하다가 장롱 속에 잠깐 들어가는 것도 두려운데, 7시간을 갇혀있었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다”고 말했다.
 
학교 관계자들도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공교롭게도 A군이 사망한 3일은 그의 첫 등교 수업이 예정돼 있던 날이었다. 학교 관계자는 “아이가 밝고 친구들과 잘 어울렸던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더욱 놀랍다”고 말했다. 학교에서는 B씨가 A군의 교육 문제에 열성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계모라는 사실도 몰랐다고 한다.
 
경찰은 A군이 사망함에 따라 전날 아동학대중상해 혐의로 구속된 B씨의 혐의를 아동학대치사로 바꿔 적용하기로 했다. 또 친부나 다른 가족을 상대로도 학대나 폭행 여부를 조사하기로 했다.
 
황수연 기자, 천안=신진호·최종권·김방현·박진호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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