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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대기자의 퍼스펙티브] 트럼프 혼자만의 생각…한국은 덩달아 놀아난 꼴

중앙일보 2020.06.04 00:39 종합 24면 지면보기

G7 확대 가능성 있나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4세기에 처음 지어진 랑부예 성(城)은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45㎞ 떨어진 랑부예 숲에 있다. 파리에서 멀지 않고 베르사유 궁과도 가까워 역대 프랑스 왕과 가족들이 사냥과 나들이 장소로 즐겨 찾았다. 지금은 프랑스 대통령 별장이다. 1975년 서방 선진국 정상들의 속닥한 사교 모임으로 출발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탄생한 곳이다.
 

회원국 동의 없이 확대 어려워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덥석 수락
트럼프 말만 듣고 김칫국 마셔
과욕이 빚은 외교 망신 가능성

공동 창안자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과 헬무트 슈미트 독일 총리를 비롯, 미국의 제럴드 포드 대통령, 영국의 해롤드 윌슨 총리, 이탈리아의 알도 모로 총리, 일본의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총리 등 6명이 참석했다. 시작은 G6 정상회의였던 셈이다. 77년 캐나다를 영입해 G7이 완성됐다.
 
G7은 경제력을 갖춘 서구 민주주의 선진국들의 프라이빗 클럽처럼 운영돼 왔다. 1997년 러시아를 회원으로 받아들여 G8이 되기도 했지만, 2014년 다시 G7 체제로 돌아갔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대한 대가였다. 선택된 소수의 배타성이 G7이 누리는 프레스티지의 원천이다. 전체 멤버들의 동의 없이는 신규 멤버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구조다.
 
올해 G7 의장국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을 올가을 미국에서 열릴 G7 정상회의에 초대했다. 전화로 직접 초청 의사를 전했고, 문 대통령은 중국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 있다는 관측이 무색할 만큼 흔쾌히 수락했다. 그 이틀 전 트럼프는 “시대에 뒤처진 G7으로는 현재의 국제정세를 반영하기 어렵다”며 한국·인도·호주·러시아를 초청 대상으로 언급했다. 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도 같은 얘기를 하면서 추가로 브라질을 언급하기도 했다.  
 
회원국 확대 구상과 함께 나온 초청인만큼 일회성이 아니라 정식 멤버로 한국을 영입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 게 사실이다.
 
선택된 소수의 배타성은 G7이 누리는 프레스티지의 원천이다. 사진은 지난해 8월 프랑스 대서양변의 휴양도시 비아리츠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모습. 가운데 정면에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부터 시계 방향으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도날드 투스크 유럽연합 상임의장.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 아베 신조 일본 총리. [AP=연합뉴스]

선택된 소수의 배타성은 G7이 누리는 프레스티지의 원천이다. 사진은 지난해 8월 프랑스 대서양변의 휴양도시 비아리츠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모습. 가운데 정면에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부터 시계 방향으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도날드 투스크 유럽연합 상임의장.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 아베 신조 일본 총리. [AP=연합뉴스]

통화 다음 날 바로 청와대는 G7 확대와 한국의 참여를 기정사실화했다. 트럼프가 한국을 G7 정상회의에 초청한 것은 “일시적 옵서버 자격이 아닌, G11 또는 G12라는 새로운 국제 체제의 정식 멤버 자격”이라며 “이는 한국이 세계 질서를 이끄는 리더국 중 하나가 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G20에서 더 나아가 G7 반열로 올라서면 “국격 상승과 국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청와대가 너무 성급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당장 유럽 쪽에서 반발이 나왔다. 유럽연합(EU)의 조셉 보렐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구성원을 바꾸고, 영구적으로 구성 방식을 바꾸는 것은 G7 의장국의 특권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의장국 자격으로 게스트를 초청할 수는 있지만, 회원국 확대는 미국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얘기다. 그의 말은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G7 내 EU 회원국들의 의견을 대변한 것으로 봐야 한다.
 
신규 회원국들은 자신들의 위상이 최고 선진국 그룹인 G7 수준으로 올라간다고 보겠지만, 기존 회원국들은 새로 들어오는 나라들 수준으로 자신들 위상이 떨어진다고 볼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G7 국가들의 위상은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한국은 방역 성공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으며 위상이 올라갔다. 그렇다고 한국을 자신들과 동급으로 봐줄 순 없다는 것이 G7 회원국들의 속내일 것이다.
 
일본은 더하다.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가진 G7 멤버십에 대한 일본인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른다. 동양에서 처음으로 근대화를 이룩해 ‘탈아입구(脫亞入歐)’에 성공한 일본에 대한 서양인들의 예우로 일본은 G7 지위를 받아들이고 있다. 식민지였던 한국이 자신과 동등한 반열에 올라서는 것을 일본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일회용 옵서버로 참가하는 건 몰라도 정식 회원국 지위는 말도 안 된다는 격앙된 반응이 온라인에 쏟아지고 있다.
 
트럼프가 말한 G7 체제의 개혁 필요성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출범한 G20 체제에 이미 반영된 것이 사실이다.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이 꼬집었듯이 G20이 있는데, 굳이 G11이나 G12를 새로 만들 이유가 뭐냐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오는 게 중국 배제론이다.
 
백악관은 한국 등을 G7 정상회의에 초청하는 이유를 “중국의 미래를 어떻게 다룰지 논의하기 위해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들을 한자리에 모으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트럼프의 초대는 코로나19 책임론과 중국의 홍콩 보안법 통과 등으로 미·중 간 신(新)냉전 양상이 노골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반중(反中)·친미(親美) 연대에 줄을 서라는 초청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트럼프의 G7 확대 구상

트럼프의 G7 확대 구상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달라졌다. 드디어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는 국민적 자긍심도 높아졌다. 이런 터에 명실공히 최고의 선진국 클럽 가입을 의미하는 G7 정상회의 초청은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영국이나 프랑스 수준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부터 갖추는 게 맞다. 지금 들어가면 트럼프의 배려(?)에 의한 ‘정원 외 입학’으로 손가락질받을 수 있다.
 
트럼프의 달콤한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기 전에 한국은 G7 회원국들의 공감대부터 확인했어야 한다. 그게 외교 실무자들의 역할이다. 트럼프의 말만 믿고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 될 가능성이 지금으로선 커 보인다. 코로나 방역 성공에 취해 이 기회에 최고 선진국 클럽까지 진입하고 싶은 과욕이 빚은 외교 망신일 수 있다. 참모들이 다 반대해도 트럼프가 밀어붙여 성사된 북·미 정상회담의 기억이 여전히 너무 강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이후 세계 질서를 보는 두 시각
큰 전쟁은 새 질서를 만든다. 1차 세계대전은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이 주창한 14개 조 평화원칙에 기반한 베르사유 체제를 남겼다. 2차 세계대전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성안한 대서양 헌장에 입각한 전후 체제로 이어졌다. 사실상의 3차 세계대전인 코로나19와의 싸움은 포스트 코로나 체제라는 새로운 세계 질서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그 핵심은 미·중 신냉전 체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기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 간의 불가피한 대결이 코로나 사태로 더욱 격화하면서 미·중이 전면적으로 충돌하고 갈등을 빚는 구도로 갈 것이란 분석이다.
 
미 국무부 정책기획관이었던 에드워드 피시만은 이중 질서를 제시한다. 팬데믹, 기후변화, 사이버테러 같이 전 세계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빅이슈를 다루는 글로벌 질서와 생각이 같은 나라들끼리 뭉치는 소규모 질서다. 중국도 참가하는 글로벌 질서를 통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큰 문제는 함께 해결하지만, 미·중 신냉전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들이 연합해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코로나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기존 세계 질서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가 대표적이다. 강대국의 필수 요건인 소프트파워는 물론이고 하드파워에서도 코로나19가 중국이 미국을 능가하는 변곡점이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 판(版) 마셜 플랜을 통해 미국이 국제적 리더십을 보여줄 필요는 있다고 지적한다.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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