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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철의 시선] 코로나 시대 유혹 통제법

중앙일보 2020.06.04 00:37 종합 28면 지면보기
최현철 논설위원

최현철 논설위원

2011년 11월 중국 신화통신의 인터넷판인 신화왕(新華網)에 청나라 시대 만들어진 과거시험 커닝페이퍼 사진이 실렸다. 가로 4cm, 세로 5cm 두께 0.5cm 크기에 10만자가 담긴 초소형 책자가 눈길을 끌었다. 족히 만자가 넘는 글자로 도배한 종이 조끼도 보였다. 한 땀 한 땀, 아니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준비하던 수험생은 아마 “그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외우라”는 주변 잔소리도 많이 들었을 법하다. 그래도 한 방에 인생이 달라지는 시험을 마주한 수험생 심정을 마냥 외면하기도 어렵다.
 

대학 온라인 시험 커닝 논란
준비없는 시험 관리가 자초
기성세대가 통제 수단 만들어야

그렇기에 시험을 내는 입장에서는 공정성을 유지하는 게 좋은 문제를 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과제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2015년 서울대학교 중간고사에서 대규모 부정행위가 발생했다. 하필이면 사달이 난 강좌는 철학과에서 개설한 윤리 관련 과목이었다. 수강생은 200명이 넘는데 조교 한 명만 들여보낸 허술한 감독은 악마의 유혹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시험감독 강화, 엄중 처벌 등이 논의되는 와중에 이 학교 자연대는 시험 감독을 아예 없애겠다는 대책을 내놓아 시선을 끌었다. 대신 학생들은 명예 규칙(Honor Code)에 서명토록 했다. 한마디로 양심에 맡기지만 걸리면 국물도 없다는 내용이다.
 
딱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미국 주요 대학들이 대부분 시행하는 제도였다. 가장 먼저 시행했다는 프린스턴대의 역사는 120년이 넘는다. 우리나라에도 있다. 1954년 설립된 인천 제물포 고등학교는 개교 2년 만에 무감독 시험을 도입했다. 요즘도 이 학교 학생들은 시험 전에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명예롭다”는 구호를 외치곤 감독 없는 시험을 치른다.
 
양심과 명예에 호소하는 방식은 꽤 교육적이다. 제물포고가 이 제도를 도입한 지 60년을 맞이해 실시한 연구용역 자료를 보면 재학생과 졸업생 대부분은 무감독 시험 전통을 지켜온 것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었다. 졸업 후에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게 하는 동력이 된다고도 했다.
 
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이 학교를 졸업한 지인은 학교 다닐 때 정말 커닝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한심하다는 듯 답했다. "당연히 있었지.” 용역 보고서엔 다른 고민도 살짝 엿보인다. 졸업생 상당수는 대학 진학 후 주변에서 벌어지는 개인적, 집단적 커닝에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었다고 답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도 2013년 대규모 부정행위가 적발됐다. 시험지를 집에 가져가 풀어오는 시험에서 유사한 답안이 쏟아지자 채점하던 조교가 학교 측에 알렸다. 조사 결과 250명의 수강생 중 절반가량이 부정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주 중앙일보는 다트머스대에서 2014년 가을학기에 64명이 부정행위를 했다가 적발돼 징계처분을 받았다고 전했다. 공교롭게도 문제의 과목은 ‘스포츠 윤리’였다. 이듬해 스탠퍼드대에서도 83명이 부정행위로 정학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코로나 시대를 맞아 무감독 시험은 ‘뉴노멀’이 될 수밖에 없다. 수업도 얼굴 맞대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니 대면시험을 고집하기 어렵다. 미국의 수능 격인 SAT를 주관하는 칼리지보드는 코로나 때문에 6월 시험까지 취소되자 ‘디지털 홈 테스트’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상반기 대졸자 공채 필기시험 직무적성검사(GSAT)를 온라인으로 치렀다.
 
문제는 뉴노멀이 된 시험에서도 양심과 명예·전통이 통할 것이냐다. 요즘은 굳이 깨알 크기로 10만자를 준비하지 않아도 클릭 몇 번이면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쉽게 눈앞에 펼쳐진다. 반면 수험생은 동료, 혹은 경쟁자가 무슨 짓을 하는지 볼 수 없다. 누군가는 같이 부정행위를 하자고 부추긴다. 이런 불안감을 극복하기엔 양심과 명예는 힘이 달린다.
 
역시 구원투수로는 가상·증강현실(VR·AR)과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이 나설 전망이다. 4년 전부터 온라인 원격시험을 도입한 ‘듀오링고 DET’의 경우 수험생은 웹캠을 켜고 시험을 본다. AI와 감독관은 이 영상을 분석해 다른 사이트를 여는지, 대화하는지 등을 잡아낸다고 한다. 삼성도 응시생들에게 컴퓨터로 시험을 치르는 동시에 스마트폰으로 얼굴과 손, 모니터 등을 찍어 실시간 전송토록 했다.
 
최근 인하대 의예과를 비롯해 대학가에서 발생한 부정행위 논란을 보면 학교 측은 이런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시험 문제 제시와 답안 제출을 온라인으로 했을 뿐, 앱을 통한 실시간 모니터링도 없었다고 한다. 수행에 갓 입문한 동자승 앞에서 고기 굽는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부정행위를 비호할 마음은 없지만, 학생들만 비난하는 것도 뭔가 부족하다. 코로나 시대에 유혹을 통제할 최소한의 수단을 준비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몫이 아닐까.
 
최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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