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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2035] 다음 칼럼을 기대해

중앙일보 2020.06.01 00:17 종합 24면 지면보기
채혜선 사회2팀 기자

채혜선 사회2팀 기자

“적어도 결혼 앞에서 30대 여기자는 약자(弱者)다. 한국의 미혼 남성이 원하는 신붓감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2014년 2월 중앙일보 ‘시선2035’에 한 선배는 이 같은 말로 시작하는 칼럼을 썼습니다. 그로부터 6년이 흘렀지만,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미투(#MeToo)라는 거대한 물결을 지났고, 페미니즘이 대중화됐다고 여겨지는 2020년에도 말입니다.
 
올해 초 한 출입처로 처음 인사하러 간 날이었습니다. “여기자들은 기가 세잖아요. 남자는 기센 여자 안 좋아하는데”라는 우스갯소리가 툭 던져졌습니다. 제 할 말 다하던 어느 선배를 언급하면서는 “그래서 여기자들이 시집을 늦게 간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여자는 일할 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선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을 느낍니다. 만약 목소리를 꼿꼿하게 낸다면 “한국의 미혼 남성이 원하는 신붓감”에서 탈락할 것이고, “저 봐. 여기자는 기가 세다니까”라며 뒷말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의사 설명숙(채국희 분)이 부원장 승진 문제를 얘기하다 원장에게 꾸지람을 듣고 있다. [사진 JTBC ‘부부의 세계’ 캡처]

의사 설명숙(채국희 분)이 부원장 승진 문제를 얘기하다 원장에게 꾸지람을 듣고 있다. [사진 JTBC ‘부부의 세계’ 캡처]

여자라는 전체 범주에 가두고 개인을 깎아내리는 편견의 언어가 일터에서 반복되는 건 저만 겪는 별난 일이 아닙니다. 지난 16일 막을 내린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산부인과 전문의였던 설명숙(채국희 분)은 병원장에게 부원장 승진을 요구했다가 “하여튼 어딜 가나 이놈의 여자들이 문제야”라는 핀잔을 들었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되고 인성 지적을 받는 장면이 드라마에 나와도 어색하지 않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이다혜 기자는 저서 『출근길의 주문』에서 “왜 여자들에게 유독 인성 논란을 비롯한 온갖 ‘일 바깥’의 논란이 생길까”라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일터에 있는 여자는 일이 아닌 ‘일 밖’의 일로 평가받을 때가 잦다는 겁니다.
 
최근 교도소에 있는 토막살인범 A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기사 잘 보고 있다”는 응원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뻔했지만, 제 외모에 관한 얘기가 대다수였습니다.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소개한 남성이 누리는 ‘평범한’ 특권 중에는 ‘나의 외모가 전형적인 매력이 없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며 무시할 수 있다’는 문항이 있습니다. A의 편지로 제가 이 문항과 거리가 먼 사람임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만약 이 칼럼이 6년 후에도 이어진다면 “선배 때나 그랬지 이젠 아니에요”라는 답을 받고 싶습니다. 제가 마주하는 불편한 일들이 언젠가는 “라떼는 말이야”처럼 놀림당하는 낡고 따분한 유머로 전락하길 바랍니다. 아직 제 칼럼에는 제 외모를 평가하는 댓글이 주를 이루겠지만 말입니다.
 
채혜선 사회2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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