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홍병기 曰] 500번째 월급

중앙선데이 2020.05.30 00:28 688호 30면 지면보기
홍병기 중앙CEO아카데미 원장

홍병기 중앙CEO아카데미 원장

“직장 생활을 마칠 때까지 월급을 500번 받아보는 게 제 꿈입니다.” 몇 년 전 경제 현장에서 만났던 금융사 임원 한 분이 들려줬던 이야기다. 상고를 졸업하자마자 샐러리맨 생활을 시작한 그는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견뎌내며 평사원에서 임원까지 올라갔던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소식이 궁금해 수소문했더니 번듯한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연임하면서 이제 그 꿈을 이룰 날이 머지않았다는 후문이다.
 

지속가능한 일자리 만들어야 가능한 일
직업 늘리기, 정년연장 본격 고민할 때

500번째 월급을 받으려면 얼마나 오래 회사에 다녀야 할까. 입사 후 잘리지 않는다 가정해도 만 41년 8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고교를 나온 18살에 일찍 취직하더라도 60이 다 돼서야 가능한 일이다. 하루 8시간씩 일하며 한 달 25일 근무한다고 쳐도 10만 시간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게 500번째 월급이다. 미국의 경영사상가 말콤 글래드웰의 책 『아웃라이어』에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선 1만 시간의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는 ‘1만 시간의 법칙’에 견주어 보더라도 전문가가 열 번은 되고도 남을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실상은 어떠한가. 20대 중 후반에야 겨우 취직하고도 40, 50살만 넘어가면 ‘사오정’ 운운하며 명예퇴직이다 뭐다 해서 반퇴 인생이 시작되는 우리네 평범한 직장인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그야말로 영전과 승진을 거듭하는 금수저 성공 사례에나 어울리는 이야기다. 더구나 500번은 고사하고 첫 월급조차 받지 못한 청년 실업자들이 곳곳에 넘친다. 한 번이라도 그럴듯한 직장의 월급을 받아보고 싶다는 그들에겐 배부른 자들의 호사스러운 이야기일 뿐이다.
 
몇 년째 휴가도 없이 일만 해온 수많은 부장님, 이사님들은 이제 ‘구조조정’, ‘실적 악화’,  
 
‘부서 통폐합’으로 하루아침에 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실례로 지난해 직장에서 밀려난 40, 50대는 5년 만에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통계청 자료 분석 결과 지난해 우리 경제의 ‘허리’인 40, 50대의 비자발적 퇴직자는 49만 명에 육박하며 2014년 이후 최대치를 나타냈다. 직장의 휴·폐업이나 일거리가 없어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급증했다는 이야기다. 바야흐로 500번의 월급은 언감생심, 지금 있는 일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위기인 시대다.
 
입사 후 20년이 돼도 240번, 30년이라도 360번의 월급을 받은 데 불과하니 500번의 월급이란 얼마나 멀고 먼 직장인의 여정인가. 고령화 시대에 지속 가능한 고용을 통해 정년 없이 일하는 시대가 도래해야만 현실화될 수 있는 일이다.
 
올해부터 60세 정년을 맞은 386세대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청년층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과 함께 올드 제너레이션들의 일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늘려나가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벌써 2022년 대선엔 고참 직장인과 노령 유권자들을 겨냥한 ‘정년 63세 연장’이 폭발적인 공약이 될 것이라는 정치권의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오래 일할 수 있는 일자리의 종류를 늘리는 일도 중요하다. 미국에는 3만6000여 개, 일본에는 2만5000여 개의 직업이 있다는데 한국은 1만 2천여 개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직업 2만 개 만들기’야말로 바로 노동 연장의 첫걸음이다. 어르신 단기 일자리 같은 녹슨 일자리에 세금을 쏟아부을 게 아니라 민간 활력을 높이고 경제 체질을 바꾸는 근본 처방을 통해 고용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 노장청이 어우러지는 노동시장에서 꼰대 인턴과 청년 사장이 함께 일하는 시대를 그려본다.  
 
“죽을 때까지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사랑과 일”이라는 괴테의 낭만적인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상실의 삶’이 아닌 풍요로운 황혼을 위한 일자리를 고민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 당신은 오늘 과연 몇 번째 월급을 받았는가.
 
홍병기 중앙CEO아카데미 원장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