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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가마 뒤 우쭐한 호위병…‘100억 마법’ 디지털 행차도

중앙일보 2020.05.27 00:03 종합 22면 지면보기
국립중앙박물관이 새로 개장한 ‘디지털 실감영상관' 중 1관에서 상영되는 ‘왕의 행차, 백성과 함께 하다’의 장면. 225년 전 정조의 ‘수원화성행차’를 3D기술로 재현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이 새로 개장한 ‘디지털 실감영상관' 중 1관에서 상영되는 ‘왕의 행차, 백성과 함께 하다’의 장면. 225년 전 정조의 ‘수원화성행차’를 3D기술로 재현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어두컴컴한 110평 공간에 들어서면 3면 파노라마로 대형 스크린이 펼쳐진다. 폭 60m, 높이 5m 스크린에서 ‘그림 속 조선인’ 1000여 명이 룰루랄라 행진을 한다.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 환갑을 맞아 화성(華城)의 사도세자 묘소(현륭원)에 성묘하러 가는 장면이다. 혜경궁 가마 뒤로 으스대며 활보하는 호위군사가 보인다. 말 탄 채 뒤돌아보는 사람, 의기양양 북 치는 사람 등 표정과 걸음이 제각각이다. 형형색색 3D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문무백관과 나인들이 어찌나 생생한지 225년 전 그날로 빨려드는 듯하다.
 

중앙박물관 ‘디지털영상관’ 개장
정조 화성행차 3D 애니로 구현
225년 전 그날로 빨려드는 듯 생생
AR·VR로 고구려 무덤 속 체험
광주·청주·대구 박물관서도 전시

11분짜리 영상 제목은 ‘왕의 행차, 백성과 함께 하다’. 지난 20일 첫선 보인 국립중앙박물관(이하 중앙박물관) 디지털 실감영상관 콘텐트 중 하나다. 정조 19년(1795)의 이른바 ‘수원화성행차’ 풍경을 현대기술로 재현했다.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원행정리의궤도’를 기초로 여러 의궤와 반차도(행렬도)를 참고해 복색과 분위기를 뽑아냈다. 새벽녘 창덕궁을 출발해 화성행궁으로 향하는 1박 2일 여정이 축제처럼 전개된다. 이 중 궁중무용은 무형문화재 전수자들의 춤동작을 ‘모션 캡처’해 그림에 입혔다고 한다.
 
전통 문화유산과 21세기 한국의 자본·기술력의 만남. 중앙박물관이 한국콘텐츠진흥원과 지난해부터 공들인 한국형 ‘실감콘텐츠’다.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 고해상동영상, 홀로그램, 외벽영상(미디어파사드) 등 여러 기술을 아우른다. 총 20개를 제작해 먼저 11개를 지난 20일부터 중앙박물관 내 디지털 실감영상관 4곳에서 상영하고 있다. 광주와 청주, 대구박물관에서도 지역 특성에 맞는 영상이 선보인다. 콘텐트 제작비 77억원, 박물관 4곳 시설 공사비 등 총 108억원이 투입된 프로젝트다.
 
미디어파사드로 거듭난 경천사지 십층석탑.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미디어파사드로 거듭난 경천사지 십층석탑.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번 프로젝트를 총괄한 중앙박물관 박물관정보화과 장은정 학예연구관은 “가상·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한 실감콘텐트는 기존 박물관의 시공간적 제약을 넘어서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중앙박물관 영상 3관(상설전시관 1층 고구려실 내)에서는 특수 프로젝터 영상으로 북한 고구려 벽화무덤 3곳을 체험할 수 있다. 학술자료와 촬영 사진을 토대로 재구성한 일종의 가상현실(VR)을 통해 안악 3호 무덤, 덕흥리 무덤, 강서 대묘의 구조와 벽화 배치를 조감한다. 2관에선 일반인 접근이 안 되는 중앙박물관 수장고와 보존과학실 등을 VR로 둘러볼 수 있다.
 
미디어파사드로 거듭난 고구려 벽화무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미디어파사드로 거듭난 고구려 벽화무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이 가장 내세우는 ‘작품’은 상설전시관 1층 복도 끝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변신시키는 ‘미디어파사드’다. 낮에는 AR 기술로 각 면의 조각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하고, 야간 개장 땐 손오공의 모험, 석가모니의 삶과 열반 등을 ‘레이저 쇼’로 구현한다. 이 프로젝트와 1관의 디지털 갤러리는 뉴에이지 음악 작곡가 양방언 음악감독이 국악을 재해석해 배경음악을 선사한다.
 
이 같은 실감형 콘텐트는 해외 유수 박물관들도 뛰어드는 트렌드다. 2015년 개관한 중국 고궁박물원 디지털 전시관에선 VR 고글을 착용하고 청 황제가 돼 옥새를 찍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청대 황실 의복 코너에선 스크린 화면을 터치해 의상 갈아입히기 놀이를 한다.
 
미국 살바도르 달리 박물관(플로리다 주 세인트피터스버그)의 경우 2016년부터 상설 전시 중인 ‘달리의 꿈 VR(Dreams of Dali in VR)’이 인기다. 360도 VR 영상으로 초현실주의적인 달리의 작품세계에 걸어 들어간 듯한 체험을 한다. 인공 지능(AI)을 통해 달리를 재현한 ‘달리 라이브(Dali Lives)’ 코너에선 관람객들이 달리와 대화를 나누고 사진 촬영도 한다.
 
이런 ‘인터랙티브 체험’은 디지털 환경에서 자란 밀레니얼-Z세대(MZ세대)를 겨냥한 박물관의 생존 전략. 장은정 연구관은 “이들은 체험 외에도 스스로 크리에이터가 되려는 욕구가 강하다”면서 “옛 문화유산을 갖고 노는 즐거움을 주고자 애썼다”고 했다. 2층 영상 2관의 ‘태평 성시도’의 경우 8K 고화질로 원본 이미지를 구현하면서 폭마다 목화솜 타기, 장원급제, 화분 운반 등 ‘터치 게임’을 배치한 이유다.
 
디지털화에 따른 고민도 있다. 한국 전통회화는 현대 디지털이 표방하는 색감이나 동작 선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자칫 우리 원본의 멋과 깊이를 훼손할 수 있다. 장 연구관은 “서양 회화와는 다른, 우리만의 톤을 살리려 했다”며 “다행히 우리 전통회화를 바탕으로 한, 스토리가 차별화된 콘텐트라 반응이 좋다”고 강조했다. 1관에서 ‘수원화성 행차’와 교차 상영되는 ‘금강산에 오르다’ ‘신선들의 잔치’ 등이 우리의 자연과 전통 도교·불교 세계를 소개하는 식이다.
 
배기동 관장은 “이번 디지털영상관은 스마트박물관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출발”이라면서 “코로나19 시대에 교류 전시의 개념도 바뀌고 있다. 이 같은 디지털콘텐트를 해외 박물관과 교류하는 방법도 모색해 갈 것”이라고 말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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