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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의 시선] 대통령의 임을 위한 행진곡

중앙일보 2020.05.25 00:42 종합 30면 지면보기
김승현 논설위원 겸 정치에디터

김승현 논설위원 겸 정치에디터

가슴 먹먹한 서사시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사엔 ‘오월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5·18을 겪지 않은 세대가 한 가정의 부모가 되고, 사회의 주축이 된 지금 시대에 5·18의 의미를 생생히 소환했다. “‘오월정신’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희망이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며 만들어진 것”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걱정하는 마음이 모여 정의로운 정신이 됐다”는 언명은 곱씹어 볼 만하다.
 

5·18에 ‘산 자여 따르라’ 메시지
용서 화해 진심, 당 위선과 괴리
문 대통령 ‘독창’으로 끝날 우려

기념식 장소도 의미심장했다.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마지막까지 계엄군에 저항하던 시민들이 진압된 곳이다. 고 윤상원(1950~1980) 열사는 그때 그곳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문 대통령은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그가 80년 5월 26일 외신 기자회견에서 한 말을 화두로 삼았다.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5·18을 취재했던 미국 일간지 볼티모어 선의 도쿄지국장 브래들리 마틴은 이후 회고담에서 “그와 그의 동료들은 마지막까지 굴하지 않았던 순교자였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순교자의 뜻을 계승했다. “전남도청에서 쓰러져간 시민들은 남은 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열어갈 것이라 믿었다. 오늘의 패배가 내일의 승리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면서다. 이어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의 부름에 응답하여 민주주의를 실천했다”고 했다. 81년 윤 열사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대통령의 연설로 재발견되고 있었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노랫말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기념사 후반부는 5·18 진상 규명으로 채워졌다. 문 대통령은 “국가 폭력의 진상을 밝혀내는 것은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는 일”이며, “처벌이 목적이 아니다. 이제라도 용기를 내어 진실을 고백하면 용서와 화해의 길이 열린다”고 했다. 기념식 이튿날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조사·처벌한 진실화해위원회 모델을 언급했다. 공소시효를 배제해서라도 범죄자를 처벌하되, 진실을 고백하면 용서·사면하는 해법이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이는 일임에도 문 대통령은 진실-고백-용서의 삼단논법을 ‘당위(當爲)’로 봤다. 친일과 독재 모두 이 과정을 거쳐야만 ‘나라다운 나라’가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더불어민주당의 177석 승리로 책임감은 더 커졌을 것이다. 그 신념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도 닿아 있다. 문 대통령은 기념식 전 광주MBC와의 특집인터뷰에서 “5·18하면 제일 먼저 노무현 변호사가 생각난다”고 했다. 둘은 고립된 광주에 동참하지 못한 ‘부채의식’을 공유하며 광주의 진상을 함께 알렸고 그 자체가 민주화 운동이었다. ‘원칙론자’인 문 대통령에게 5·18은 ‘산 자’의 책임이자 운명이다.
 
지난 정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느냐, 제창하느냐로 논쟁했던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풍경이다. 보수 정부의 5·18기념식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유체이탈’이었다면, 문재인 정부의 그것은 버거울 정도로 무거운 ‘물아일체’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과도한 진정성이 오히려 교왕과직(矯枉過直·잘못을 바로잡으려다 지나쳐 오히려 일을 그르침)의 우를 범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국민이 함께 밝혀내고 함께 기억하는 진실은 우리 사회를 더욱 정의롭게 만드는 힘이 되고, 국민 화합과 통합의 기반이 될 것”이라는 대통령의 인식에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민주당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은 문 대통령과 국민 사이 인식의 괴리를 키웠다. 정의를 기억한다던 연대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향한 국민의 성원을 사유화하고 제멋대로 관리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윤미향 당선인의 위선적인 행적을 감싸는 데 급급하다. 동지를 위해서라면 대법원의 판결도 헌신짝처럼 여기는 주장도 민주당을 지배한다. 집권여당이 ‘법의 지배’보다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의리를 우선시한다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어느 조직에나 비리는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걸 처리하는 방식”이라고 일갈했다. 거짓된 권력 앞에 누가 과거의 진실을 고해성사할 용기를 내겠는가.
 
갈등과 불신의 40년을 ‘고백과 용서’로 풀어낼 숭고한 임무는 지금의 여권이 감당하기 어려워 보인다. 수퍼 여당이라는 거대한 몸집을 더 낮추고 겸손한 권력으로 변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이 합창도, 제창도 아닌 독창(獨唱)으로 끝날까 걱정이다.
 
김승현 논설위원 겸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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