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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속 보이는 세상

중앙일보 2020.05.23 00:04 종합 27면 지면보기
송길영 Mind Miner

송길영 Mind Miner

지난 주말 올해 처음으로 수박을 샀습니다. 축구공보다 커다란 초록색의 줄무늬 속 빨간 과육은 무더위에 땀을 흘려 갈증 난 여름엔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어릴 적 여름밤 원두막에서 먹던 수박을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모깃불을 피우고 부채질과 함께 듣던 할머니의 옛이야기와 자리 옆에 놓여있던 찐 옥수수와 참외 바구니도 함께 추억으로 남아 있을 듯합니다. 여름은커녕 봄도 채 지나지 않아 만난 수박은 예전 경험으로는 낯설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지난겨울에도 이미 구경해본지라 5월 수박도 그리 빠른 것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먼저 맛보길 원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과일이 출하되는 시기를 계속 앞당겨 이제는 제철 과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기술 발전이 삶 속에 들어와
보이지 않던 속도 보이게 돼
사람 마음도 투명하게 보여져

마트에서 수박을 고르다 신기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도를 표시하는 단위인 브릭스가 11, 12, 13으로 표기된 스티커들이 수박마다 붙어있던 것이었습니다. 비파괴 당도 측정기로 검사한 결과를 소비자에게 보여주며 품질을 보증해 준 것입니다. 그간 여름이 오면 수박 잘 고르는 법을 검색해서 다시 배우곤 했습니다. 표면에 흠이 없고 매끈한 것이나 꼭지가 마르지 않은 것은 분별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두드려 보아서 청음이 나는 것을 고르라는 이야기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기에 시키는 대로 두드려 보는 시늉만 하고 아무거나 골랐습니다. 과육이 고르게 붉은색을 띄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 과일가게 아저씨는 솜씨 좋게 삼각형으로 일부를 잘라 보여주며 구매를 독려했습니다. 멀쩡한 수박을 잘라서 보여주었는데 기세 좋게 사지 않는 것 역시 보통의 용기로는 어려운 일이라 미심쩍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들고 왔다 실망한 경험 또한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렇듯 수박 고르는 기술 분야에서는 완전 아마추어인 제게 숫자로 표기된 당도는 구세주와 같았습니다. 과연 제가 사온 12브릭스의 수박은 서리가 내린 듯 포근한 식감으로 달고도 달았습니다. 미각으로 인식되는 당도를 시각으로 표현해준 기술의 발전에 감사했습니다.
 
빅데이터 5/22

빅데이터 5/22

그러고 보면 판매되는 음식의 포장지에 칼로리가 표기된 지도 한참이 지났습니다. 하루에 얼마나 먹어야 1일 대사량 안쪽의 열량을 섭취할 수 있는지 이미 알 수 있었지만, 체중조절을 해야 한다는 강박과 먹고 싶다는 욕망의 싸움에서 이겨본 적 없는 내가 애써 표기된 칼로리를 읽지 않았을 뿐입니다. 요즘 지어진 큰 빌딩의 지하 주차장에는 층별로 여유 자리를 알려주어 굳이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고를 덜어주는 곳도 많습니다. 음식물 속 성분이나 빌딩 속 지하까지도 볼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물의 속이야 그렇다 쳐도 사람의 마음 역시 알 수 있을까요?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과 같이 작정하고 속이는 사람을 잡는 것이 불가능할 듯한데 말입니다.
 
데이터가 쌓이는 시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이야기 또한 예전 같지 않습니다. 개인의 신용도는 매일의 삶 속에서 얻어지는 정보에 의해 갱신됩니다. 대금의 지불을 제때에 하지 못하거나 급한 자금의 융통을 위해 높은 금리를 감수하고라도 돈을 빌리는 행위와 같이, 일상의 경제활동들은 나의 신용정보에 차곡차곡 쌓여 공유됩니다. 휴대폰 속 내비게이션에 저장된 나의 운전 습관은 안전 운행의 점수로 환산되어 자동차 보험의 요율에 적용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의견을 개진한 나의 온라인 댓글들이 한꺼번에 열람되어 나의 생각과 철학에 대해 글을 읽는 이가 판단하는 근거로 제공됩니다. 이런 정보의 합을 통해 나의 모습이 형성되기에 나의 본 모습을 애써 숨기거나 속이려는 시도는 대부분 부질없는 일이 되어가는 세상입니다. 플랫폼 비즈니스는 서비스 제공자와 수요자에 대한 상호 평가를 축적하고 제공하여 예절바르고 품위 있는 관계를 유지하도록 독려합니다. 축적된 투명한 데이터가 바른 마음으로 서로 배려하고자 하는 우리 종의 이상을 앞당기고 있습니다.
 
속 보이는 세상의 대척점에는 표리부동함이 있습니다. “군자는 보지 않는 곳에서 삼가고(戒愼乎 其所不睹), 들리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두려워한다(恐懼乎 其所不聞)”라는 중용의 이야기가 누구에게나 절실한 사회가 오고 있습니다.
 
송길영 Mind M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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