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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글 써 가독성 신화에 저항, 삐딱선을 타고 싶다

중앙선데이 2020.05.23 00:02 687호 15면 지면보기

‘현실 밀착형 판타지’ 작가 구병모

판타지와 청소년이라는 두 무기를 앞세워 폭넓은 사랑을 받는 소설가 구병모.

판타지와 청소년이라는 두 무기를 앞세워 폭넓은 사랑을 받는 소설가 구병모.

①여성 킬러 조각(爪角)의 실제 나이는 65세이지만 얼굴 주름 개수와 깊이 때문에 여든 노인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조각은 할머니 킬러다. ②곤(鯤)은 귀 뒤편에 아가미가 뚫려 있어 수중에서도 살 수 있는 양서(兩棲)인간이다. ③꿈미래실험공동주택은 아이를 셋 이상 갖겠다고 약속한 가정에 제공되는 파격적인 조건의 공공임대주택이다. 무엇보다 ④마법사 빵집에서는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는 수상한 빵을 굽는다.
 

최근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출간
누아르·리얼리즘·판타지 두루 섭렵
장르·연령대 가로지르며 사랑받아

“판타지, 대단할 것 없는 생활 일부
리얼리즘 못잖게 현실 돌아보게 해”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사진 구병모]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사진 구병모]

눈치채셨나. ①~④는 모두 한 작가의 소설 세계다. 네 작품의 특징을 각각 요약한 것이다. 누굴까. 구병모(44)다. ①은 2013년 장편 『파과』, ②는 2011년 장편 『아가미』, ③은 2018년 장편 『네 이웃의 식탁』, 그리고 ④는 2009년 데뷔작이자 대표작, 40만 부가 팔린 『위저드 베이커리』다. 굳이 장르 구분을 하자면 ①은 누아르, ②는 판타지, ③은 리얼리즘, ④는 다시 판타지. 이렇게 다채로운 작가가 또 있었나 싶다.
 
등단작 『위저드 베이커리』. [사진 구병모]

등단작 『위저드 베이커리』. [사진 구병모]

그런데 구병모는 장르만 가로지르는 게 아니다. 연령대도 가로지른다. 『위저드 베이커리』는 결국 어른들이 많이 봤지만 처음에는 청소년 소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세상에 나왔다.
 
구병모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최근 출간한 짧은 장편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역시 시장 반응이 좋다는 얘기가 들렸다. 코로나를 피해 e메일 인터뷰했다. 새 소설책은 이런 홍보 문구를 두르고 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건 구병모식 환상”. 지구촌 누구에게든 환상이 절실한 시절이다.
 
판타지 혹은 환상은 당신 소설에서 어떤 의미인가. 다른 작가의 환상과 다른가.
“출판사에서 구병모식 환상이라는 표현을 쓴 건 평소 환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내 태도를 반영한 것 같다. 환상이라고 대단할 것도 없고 그냥 보통 생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내 소설을 두고 현실 밀착형 판타지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현실에는 분명히 없는 이야기지만 어딘가에는 있을 것만 같다, 아니면 어딘가에는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뜻인 것 같다.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는 중년 회사원과 판타지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요소를 결합했는데,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게 내 특징이라고 독자들이 봐주시는 것 같다. 사실 내 소설에 환상적인 요소가 항상 들어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눈에 띄는 요소다 보니 구병모 하면 판타지를 떠올리는 것 같다. 아직 대표작은 쓰지 못했다. 기다려주시기를.”
 
판타지는 비현실적이어서 현실의 모순을 회피하려는 무책임한 태도 아니냐고 누군가 지적한다면.
“판타지도 리얼리즘 소설 못지않게 현실을 돌아보고 고민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당장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점은 리얼리즘 소설도 마찬가지 아닌가. 당연하게도, 현실의 문제는 소설 밖에서 살아 있는 인간들이 싸워서 풀어야 하니까. 환상성은 그 싸움의 필요성을 알도록 만드는 여러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청소년과 성인에게 두루 읽히는, 경계 선상의 작업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청소년 문학을 권장 도서목록이나 독서 토론 재료 같은 것으로만 여기다 보니 고유의 작품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청소년 소설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좋았다’, ‘청소년 소설로 국한시킬 게 아니다’, 이런 리뷰를 가끔 접한다. ‘SF인 줄 알았는데 인간 보편의 문제를 다루더라’, ‘추리소설인 줄 알았는데 고도의 심리극이더라’, 이런 반응과 유사한 맥락이다.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존재하는 한 청소년 문학이 하나의 카테고리로 정착하고 활성화돼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은 요원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한국문학만의 문제도 아니고 하루 이틀 있었던 일도 아니라서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약간 내려놓은 편이다. 그러든지 말든지 작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써나가니까.”
 
소설에서 신랄한 시선이 두드러지는데.
“나 자신을 둘러싼 현실이 총체적으로 불만스럽고 그래서 불편할 때가 많은데 그런 감정을 가능한 한 정제된 표현을 써서 드러내려 하다 보니 그런 신랄한 시선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어떤 현실이 그렇게 불만스럽나.
“작가에게 불만은 습관을 넘어 일종의 숨쉬기에 가까운 거라고 믿는다. 구체적으로 뭐가 불만이고 어떤 것들이 개선되기를 바란다는 식의 정치적·사회적 얘기가 아니라 나 한 몸 숨 쉬는 것 하나하나까지 모두 불만이라고 하면, 좀 그런가. 구체적인 불만의 목록은 끝이 없으니 지금 당장의 불만 세 가지를 꼽는다면, 전염병으로 인한 실존의 위협, 사람을 대하는 기본 마인드는 결여돼 있으면서 미래의 납세자가 될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고만 하는 정부, 계속 미뤄지는 n번방 명단 전체 공개, 이런 것들이다.”
 
만연체 문장을 자주 써서인지 매끄럽게 안 읽힌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는데.
“문장에 관한 결심 중 하나는 ‘쉽게 읽히지 않겠다’는 것이다. 목적지까지 뻥 뚫린 고속도로를 내는 게 아니라 울퉁불퉁한 자갈길로 안내하는 것, 거치적거리는 문장으로 독자들의 길을 가로막고 쾌속 질주하지 못하게 하는 게 내 목적이다. 굉장히 고약한 방법 같지만 이 방법 말고 가독성의 신화에 저항하는 수단을 알지 못한다.”
 
가독성의 신화에 저항하는 이유는.
“명료하게 잘 읽히는 짧은 문장이야말로 좋은 것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인식한다면, 별다른 갈등 없이 그에 동의해서는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삐딱선을 타고 싶다.”
 
좋아하는 작가를 꼽는다면.
“한국 작가들을 들기는 좀 그렇고, 외국 작가 가운데 실비 제르맹, 에니 에르펜베크, 조르주 페렉, 제발트, 파스칼 키냐르 같은 작가들이다. 언어를 단지 ‘서사를 실어나르는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겠다는 목적보다는 언어 자체와 싸우거나 친교하는 느낌, 그런 느낌이 좋다.”
 
문학은 당신에게 구원인가.
“구원이나 탈출 같은 크고 깊고 무거운 말은 되도록 아끼고 싶다.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그런 이유도 분명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노동이자 생활이니까.”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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