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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엄근진' 그 중년남성, 어떻게 요리교실 왔을까

중앙일보 2020.05.22 15:00

[더,오래] 히데코의 음식이 삶이다(4)

 
“나로서 존재할 수 있어서 요리 교실에 다녀요.” 
 
윤 교수는 요리 교실에 다니는 이유를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그를 둘러싸고 일어난 ‘회 소동’은 분홍색 고무장갑을 가져오겠다고 말한 50대 후반의 남자 수강생에게 수강료를 환불해주며 일단락됐다. 지금 돌이켜보면 왜 환불까지 해주면서 수강생의 요구를 거절했는지 모르겠다. 오랜 기간 혼자 살아왔을 그는 일반 남성에게는 특수한 공간인 연희동 요리 교실까지 여러 생각을 품고 요리를 배우러 왔을 것이다. 그로서는 당연한 요구를 선생인 나와 같은 클래스 구성원에게 ‘정중히’ 했을 뿐인데, 단박에 이제 오지 않아도 된다는 한 통의 메시지로 아무렇지 않게 끝내버렸다. 모처럼 꾸었을 아저씨의 꿈을 망친 것만 같아 지금에서야 깊이 후회한다.

 
인생 제2막의 식생활을 혼자 힘으로 즐겁게 해결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독거노인 예비군 클래스’를 만들었고, ‘독거노인’란 표현이 조금 지나친 것 같아 약간 미화시킨 ‘요섹남을 위한 요리교실’로 이름을 바꿨다. 우여곡절 끝에 착실히 요리교실의 주요 클래스로 성장해온 최근에는 ‘남자의 부엌’이라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즉, 남자라고 해서 어떤 특별한 이유를 억지로 갖다 붙일 필요는 없지만, 여자에게 방해받지 않는 남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제공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남자 요리 교실에서는 음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남녀의 사소한 차이를 발견할 수도 있어 나 또한 즐겁고 배우는 것이 많다.
 
한 달에 한 번 남자 요리 교실에 다니는 윤 교수의 동료가 있다. 윤 교수와 동갑인 최 교수가 연희동 요리 교실에 다닌 시간은 윤 교수보다 짧다. 그는 혼자 요리책을 보며 음식을 만드는 데 한계를 느껴 꽤 오래전에 요리교실 사이트에서 수강 신청을 했단다. 나는 컴퓨터로 글이나 파일을 작성하거나 간단한 검색만 하는 터라 홈페이지 관리를 컴퓨터 사용에 능숙한 후배에게 맡겨놓았다. 그래서 요리교실 수강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가 더러 있다. 최 교수 말로는 6년 전 장문의 메시지와 함께 수강 신청을 했는데, 한 번도 답장이 안 왔다고 한다. 나는 그저 명단에서 누락되어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수밖에 없다. 여차여차해서 최 교수는 윤 교수와의 연줄로 우연한 기회에 2년 전부터 요리 교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인생 제2막의 식생활을 혼자 힘으로 즐겁게 해결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만들어진 남자 요리교실. 우여곡절 끝에 착실히 주요 클래스로 성장해온 최근에는 ‘남자의 부엌’이라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 Pixabay]

인생 제2막의 식생활을 혼자 힘으로 즐겁게 해결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만들어진 남자 요리교실. 우여곡절 끝에 착실히 주요 클래스로 성장해온 최근에는 ‘남자의 부엌’이라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 Pixabay]

 
연줄이라기보다는 남자 요리 교실이 아직 개설되지 않았던 당시 요리와 술 페어링 클래스를 듣던 윤 교수가 갑작스레 결석하게 되어 최 교수가 대신 찾아왔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50대 아저씨가 홀로, 처음으로 요리 교실이라는 신세계에 한발 들여놓게 된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윤 교수님 대신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해가 길어진 5월의 늦봄. 둥근 검은 테 안경을 쓴 최 교수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퍽 예민해 보였지만 딱히 긴장한 모습은 아니었다. 남자 요리 교실이 아니라 여성이 대부분인 요리 교실에 갑자기 나타난 최 교수. 늘 오던 윤 교수와는 다른 아저씨. 평소 저녁 수업은 30대부터 40대 사이의 직장인 여성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날 수업에 한해 최 교수와 비슷한 연배나 그보다 높은 나잇대의 수강생도 있었다. 낯선 분위기에 최 교수는 거의 말이 없었다.
 
그날 수업 테마는 ‘일본의 화이트 와인과 어울리는 요리’. 일본을 대표하는 야마나시현 고슈 와인에 어울리는 메뉴는 봄양배추와 바지락 와인찜, 봄나물 샐러드, 금태 술찜, 차돌박이와 우엉 다키코미고한(다양한 재료를 넣은 일본식 영양밥), 오보로지루(일본식 순두부인 오보로두부를 사용한 니가타현의 향토 국요리)였다.
 
“여러분, 좋은 와인이 들어와서 누군가를 초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며 욕심부리느라 정작 자신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적이 있지 않나요? 술안주는 와인잔을 한 손에 쥐고, 또는 한 잔 마시고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만들 수 있는 메뉴여야 함께 술을 즐길 수 있어요.”
 
7시가 지나 수업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일본의 고급 와인을 마실 수 있게 되어 메뉴를 고르느라 머리를 싸맸는데, 수강생에게 와인을 한 손에 들고 안주를 만들어야 한다고 명쾌하게 단언한 이상 간단하면서도 기막히게 맛 좋은 요리를 소개해야 했다. 고슈 와인은 다른 나라의 화이트 와인보다 꽤 드라이하고 쌉싸름하다. 그날 메뉴는 모두 묵직하지 않고 산뜻한 봄의 식재료를 충분히 입안에서 느낄 수 있는 조리법으로 구성해서 초보라도 할 수 있는 요리뿐이었다.
 
벌써 몇 년째 요리 교실에 다니는 수강생도 있었기에 요리도 착착 진행됐다. 대체로 설명만 하면 따라 할 수 있었다.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라는 유교적인 가르침을 받고 자란 한국의 아저씨 세대를 남편으로 둔 50대 커리어우먼은 일이며 육아며 가사며 전부 해내 왔다. 여하튼 입도 손도 빠르다. 레시피를 봐도 잘 모르는 부분은 선생인 나에게 물어가며 척척 요리를 완성해간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최 교수만이 와이셔츠 소매는 걷어 올린 채로 팔짱을 끼고 멀뚱히 서 있었다. “최 선생님, 거기 서 있지만 말고 여기 와서 우엉을 연필 깎듯이 썰어주세요.”
 
너무 안 움직여서 나도 아주 조금은 짜증스러운 말투로 내뱉었다. 최 교수는 아무 말 없이 내게서 물이 담긴 볼과 부엌칼을 받아 아일랜드 식탁에서 묵묵히 다키코미고한에 넣을 우엉을 썰었다. 나름대로 요리는 해본 손놀림이었다. 그렇게 입도 손도 빠른 50대 커리어우먼 덕에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5종류의 요리가 완성됐다.
 
'쨍그랑, 파직.' 특별한 와인을 마시는 날이라며 꺼낸, 가장 아끼던 와인잔 네 개가 싱크대 안에서 예술 작품 처럼 깨져 있었다. [사진 Pixabay]

'쨍그랑, 파직.' 특별한 와인을 마시는 날이라며 꺼낸, 가장 아끼던 와인잔 네 개가 싱크대 안에서 예술 작품 처럼 깨져 있었다. [사진 Pixabay]

 
태풍이 거세게 불고 지나간 것처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요리가 테이블 위로 차례차례 옮겨진다. 한국에 고슈 와인을 수입하는 회사 대표가 일본 와인에 대해 간단한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 수업이 끝날 무렵 특별 게스트로 아틀리에에 찾아왔다. 40대 후반의 남자 대표는 우리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차게 보관한 화이트 와인을 설명과 함께 마시고 다 함께 만든 요리를 한입씩 맛보고는 또 다른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중년 여성들 사이에서 얼이 빠진 상태였던 최 교수는 아주머니들의 수다에 역시나 말이 없었다.
 
‘쨍.’
‘쨍…… 쨍그랑, 파직.’ 
얼큰하게 취한 기분으로 시작된 수업의 클라이맥스, 식기 뒷정리. 테이블 위를 치우고 있던 나는 부엌 쪽으로 뛰어갔다. 특별한 와인을 마시는 날이라며 꺼낸, 내가 가장 아끼던 잘토의 와인잔 네 개가 싱크대 안에서 예술 작품처럼 깨져 있었다. 그 앞에서 망연자실 서 있던 최 교수. 만약 아들이나 남편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귀청이 떨어지라 소리를 질렀겠지만, 최 교수는 그날 처음 본 사이였다. 분명 중년 여성들 기에 눌려 엄청 긴장하고 있었겠지. 깨지면 곤란한 걸 수업에 사용한 내가 바보라며 혼자 마음속 동요를 억누르려고 애썼다. 내 심리 상태를 파악한 중년 여성 모두 나를 위로해줬지만, 그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내가 윤 교수와 최 교수의 학회 케이터링을 돕게 됐고, 한턱낸다고 하기에 홍대 중화요릿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둘러 나간 나는 마음속 응어리로 남아 있던 잘토 와인잔 변상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 봤다. 최 교수가 언젠가는 사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아무 소식도 없었기 때문에 속 좁은 여자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됐음에도 마음먹고 물어본 것이다. 와인잔 한 개에 진짜 가격은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고, 절반 가격으로 네 개 값을 현금으로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 받은 변상금은 그날 3차에서 위스키 두 잔을 내가 쏘면서 집에 도착했을 때는 현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와인잔 사건 이후 가을부터 시작된 학기에 남자 요리 교실이 추가됐다. 최 교수처럼 여성만 있는 수업에 참여했다가 다음 학기부터 나오지 않는 아저씨가 종종 있다. 요리 교실에 참가하는 각자의 이유와 낭만이 있어 연희동까지 와주는 것일 텐데, 어떤 해결책을 만들어야겠다고 고민하며 윤 교수와 상담 끝에 나온 결과가 남자 요리 교실이다. 최 교수는 2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오고 있다.
 
여성은 세대와 관계없이 네트워크의 하나로 같은 요리 교실을 다니며 친해지는 모임이 많다. 비슷하다고 하면 비슷하겠지만, 중년 남성이 바라는 ‘남자의 요리 네트워크’에는 분명 우리 중년 여성은 모르는 매력이 있을 것이다.
 
인생 제2막에 들어서려는 중년 남성이 자신이 있을 곳이나 자기만의 시간을 찾아내 요리 교실에 다니는 이유는 중년 여성이 요리 교실에 다니는 이유보다 훨씬 명확하다. 다만 세상의 중년 남성이여. 점잖고 다정한 것도 좋지만 혼자서도 강해져야 한다.
 
일본 영양밥. [사진 Pixabay]

일본 영양밥. [사진 Pixabay]

차돌박이와 우엉 다키코미 고한 레시피
재료(3~4인분)
 
- 쌀 2컵(360ml)
- 밥 양념: 다시 360ml, 청주 1큰술, 양조간장 1/2큰술, 소금 1/2작은술
- 차돌박이 100g
- 우엉 1/2개
- 참기름 2작은술
- 달래(또는 참나물) 
 
만들기
 
1. 쌀은 씻어서 물기를 잘 뺀다.
2. 계량컵에 물360ml와 양념을 섞어둔다.
3. 차돌박이는 미리 냉장고에서 꺼낸 후 소금 후추로 간한다.
4. 우엉은 연필깎이처럼 깎고 물에 담근 후 2,3번 잘 씻는다. 물기를 뺀 우엉, 차돌박이를 넣고 참기름으로 볶는다. 차돌박이 색이 변화하면 쌀도 넣고 같이 볶다가 2번을 붓고 밥을 짓는다.
5. 냄비밥은 처음에 강불로 끓이다가 약불로 내리고 10분정도 짓는다. 전기밥솥은 백미기능으로 밥짓는다.
 
키친 크리에이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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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와 히데코 나카가와 히데코 키친 크리에이터 필진

[히데코의 음식이 삶이다] 요리교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끼고 소통한 이야기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제가 주인공이 되어 '음식이 왜 삶인가'를 쓰려고 합니다. 요리를 배우러 오는 수강생들부터 가족, 친구, 연희동 동네주민들, 식재료 거래처 사람들까지, 아주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와 저의 삶, 생각, 느낌을 문장 속에 녹여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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