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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나 오크통 출신이야" '배럴숙성'맥주의 쿰쿰한 맛

중앙일보 2020.05.21 15:00

[더,오래]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43) 

처음 ‘배럴 숙성(Barrel-aged)’ 맥주를 마셨을 때의 느낌을 잊지 못한다. 커피만큼이나 어두운 액체에서 풍겨 나오는 바닐라와 초콜릿, 참나무의 강렬한 향, 한입 넘겼을 때 입안을 가득 채우던 풍성한 바디감, 알코올 도수 10도가 넘는 고도수에서 빚어지는 뜨끈함이 놀라웠다. 묵직한 맛의 배럴 숙성 맥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밝은 빛깔에 시고 상큼하면서도 쿰쿰한 맛을 갖춘 배럴 숙성 맥주도 있었다. 그동안 마셔왔던 어떤 맥주에서도 기대할 수 없었던 생경하면서도 복합적인 풍미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배럴. [사진 Pixabay]

배럴. [사진 Pixabay]

 
‘캐스크(cask)’라고 불리기도 하는 배럴은 나무로 만든 통을 말한다. 주로 단단하고 향이 좋은 참나무과의 나무로 만들어진다. 배럴 숙성 맥주는 말 그대로 이런 통에 담겨 숙성된 맥주다. 
 
과거 독일이나 벨기에, 영국 등에서는 전통적으로 나무통을 이용해 맥주를 만들고 운반했다. 이는 단지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생적이고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스테인리스 양조 장비가 등장하고 나서 배럴을 이용한 맥주 양조 전통은 거의 사라졌다.
 
스테인리스 스틸 장비가 넘쳐나는 이 시대의 배럴 숙성 맥주는 다른 주류의 풍미를 덧입혀 맥주의 맛과 향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다. 일반적인 맥주 양조 공정을 통해 완성된 맥주를 위스키나 와인, 럼, 데낄라 등을 만들고 나서 비워진 배럴에 넣어 짧게는 수주,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숙성시킨다. 이 과정에서 배럴에 배어있던 술이 맥주로 스며들어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낸다. 또 나무 자체의 향과 더불어 배럴에 서식하던 미생물이 저마다의 역할을 하면서 신비한 맛을 완성한다.
 
이렇게 독특한 배럴 숙성 맥주를 상업적으로 처음 내놓은 곳은 미국 시카고의 구스 아일랜드 양조장이었다. 구스 아일랜드는 1992년 짐 빔 위스키가 만들어졌던 중고 배럴에 스타우트 맥주를 100일 동안 숙성해 ‘버번 카운티 스타우트’를 내놨다. 버번위스키에서 느낄 수 있는 초콜릿, 바닐라, 캐러멜, 코코넛의 향과 배럴 안쪽을 태우면서 나타나는 훈제 향이 은은하게 드러나는 맥주다.
 
미국에서는 법으로 버번위스키 배럴을 단 1회만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른 위스키나 와인의 배럴이 수번에 걸쳐 재사용되는 것과 다른 점이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는 버번위스키를 담았던 통을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창의적인 수제맥주 양조장에서 이를 채택해 새로운 맥주를 만들어낸 것이다. 버번 카운티 스타우트는 기존 맥주 양조의 상식을 벗어난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시 맥주 대회에서 실격했다고 한다. 이제는 맥주 대회에서 배럴 숙성 맥주 카테고리가 따로 생길 정도로 대중화됐다.
 
아무 맥주나 배럴 숙성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로 풍미가 강하고 도수가 높은 맥주가 활용된다. 배럴에 배어있는 강한 술의 풍미와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 센 맛과 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숙성 과정에서 변질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높은 도수의 맥주가 선호된다. 위스키 통에 숙성은 대부분 임페리얼 스타우트, 발리와인, 쿼드루펠처럼 강한 맥주가 활용된다.
 
섬세한 향의 사르도네, 피노누아 등 와인이 양조된 배럴에는 이와 보조를 맞출 수 있도록 세종이나 사워(신맛) 맥주 등이 주로 숙성된다. 람빅, 플랜더스 레드에일, 우드 브륀 등 전통적인 스타일의 맥주를 만드는 데도 배럴이 사용된다.
 
파이어스톤 워커 빈티지 에일. [사진 파이어스톤 워커 홈페이지]

파이어스톤 워커 빈티지 에일. [사진 파이어스톤 워커 홈페이지]

 
나무로 만든 통에서는 효모, 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을 통제하기 어려워 매번 같은 품질의 맥주를 생산하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와인이나 위스키처럼 연도가 붙어 한정판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맥주를 완성한 후 다시 통에 넣어 숙성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생산 기간이 늘어나고 생산량도 한정돼 있다. 일반 맥주보다 가격이 높고 구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런 기본적인 어려움에 더해 위스키나 와인 산업이 활성화된 해외와 달리 국내에서는 재사용할 배럴을 전량 수입해야 한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지난 2016년 수제맥주 양조장 핸드앤몰트가 국내 최초로 맥주를 피노 누아 와인 배럴, 럼 배럴에 숙성한 맥주를 선보인 후 와일드웨이브, 제주맥주 등이 잇달아 제품을 내놓고 있다. 또 부산의 고릴라브루잉은 증류소주 화요를 숙성하던 배럴에 맥주를 넣어 만든 맥주 ‘킹콩’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구스 아일랜드 소피. [사진 황지혜]

구스 아일랜드 소피. [사진 황지혜]

 
해외 유명 양조장들은 저마다 배럴 숙성 맥주를 내놓고 있다. 다루기 까다로운 배럴을 잘 활용하는 것은 양조 실력을 증명하는 하나의 검증과정이 되는 추세다. 다양한 배럴 숙성 맥주들이 수입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파이어스톤 워커 양조장의 파라볼라, 스티키 몽키나 파운더스의 KBS 등은 어둡고 진한 배럴 숙성 맥주의 대표주자다. 또 구스 아일랜드 양조장의 소피는 와인 배럴에서 만든 맥주로 상큼한 오렌지향과 바닐라를 함께 느낄 수 있다.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 객원에디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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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혜 황지혜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 객원에디터 필진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면서 맥주는 짝으로 쌓아놓는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고 있는 맥주 덕후. 다양한 맥주를 많이 마시겠다는 사심으로 맥주 콘텐츠 기업 비플랫(Beplat)을 운영하고 있다. 전 세계의 다양한 맥주 스타일, 한국의 수제맥주, 맥주를 맛있게 즐기는 방법 등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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