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양성희 논설위원이 간다] ‘부부의 세계’ 결혼제도를 의심하다

중앙일보 2020.05.21 00:42 종합 25면 지면보기

불륜 드라마의 사회학

JTBC ‘부부의 세계’는 더이상 허울 뿐인 가족의 유지가 의미없는 시대의 초상 같은 드라마다. 김희애의 압도적 연기가 화제였다. [각 방송사]

JTBC ‘부부의 세계’는 더이상 허울 뿐인 가족의 유지가 의미없는 시대의 초상 같은 드라마다. 김희애의 압도적 연기가 화제였다. [각 방송사]

28.4% 비지상파 드라마 최고 시청률 기록을 세우며 JTBC ‘부부의 세계’가 지난주 막을 내렸다. 폭발적 시청률만큼 화제였고 아직도 여진이 세다. 처음엔 불륜 이야기로 시작했으나 뒤로 갈수록 감정과 관계가 얽히고설켜 무 자르듯 잘리지 않는 부부 관계의 복잡미묘함,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 같은 이혼 이야기로 마무리됐다. 방송평론가 정덕현은 “불륜으로 인한 가정파탄의 신파적 접근이나 이혼을 통한 관계의 재정립 같은 마무리가 아니라, 깨진 듯 보여도 여전히 이어져 있는 잔인한 부부의 세계를 탐구했다”고 평했다. 미스터리 스릴러, 사회극적 요소까지 버무린 웰메이드 불륜 드라마다.
 

인기만큼 논란도 많은 불륜 드라마
성 윤리, 남녀 권력, 가족 변천 반영
시대 흐름 읽는 키워드 역할 해내
가족주의, 결혼의 위기 드러내기도

도덕과 욕망의 충돌에서 출발하는 불륜 드라마는 ‘흥행 치트키(만능열쇠)’일 뿐 아니라 한 시대의 성 윤리, 남녀 권력관계, 가족제도의 변화 등을 담아낸다. 불륜 드라마의 변천을 보면 시대와 욕망의 변천이 읽히는 이유다. 2020 ‘부부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신드롬급 인기를 누리며 한 시대의 키워드가 됐던 불륜 드라마들의 계보를 짚어본다.
  
‘아름다운 불륜’의 등장=‘애인’(1996)
 
MBC ‘애인’. [각 방송사]

MBC ‘애인’. [각 방송사]

이전까지 전통적인 TV 불륜 드라마는 추악한 불륜의 단죄, 남편의 외도로 고통받는 아내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청자들도 대부분 아내에 이입하며 드라마를 봤다. 불륜 커플은 벌 받고(특히 불륜남보다 불륜녀), 흔들린 가족의 위기는 복구됐다. 전통적 성 윤리의 확인, 가족제도의 강화가 불륜 드라마의 터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욕망’과 ‘개인’의 시대가 열린 1990년대 ‘애인’(MBC·1996)은 전혀 새로운 불륜 드라마였다. 처음으로 기혼남녀의 ‘아름다운 불륜’을 그렸다. 남자를 유혹하는 꽃뱀 상간녀 아닌 매력적인 외모의 전문직 워킹맘 황신혜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기혼여성이 불륜의 당사자인 것도 거의 처음이었다. ‘불륜 미화’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시청자들은 청춘 못지않게 설레는 이들의 풋풋한 로맨스에 열광했다. 황신혜·유동근의 패션, 극 중 데이트 장소까지 인기였다. 드라마는 새 출발을 꿈꾸던 두 사람이 각자의 배우자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아내의 임신, 남편의 방황이 계기였다. 다분히 당대 도덕관을 의식한 결과였다.
  
여자의 욕망, 무죄=‘내 남자의 여자’(2007)
 
SBS ‘내 남자의 여자’. [각 방송사]

SBS ‘내 남자의 여자’. [각 방송사]

‘애인’이 중년 커플의 성애를 빼버리고 사춘기 로맨스 같은 ‘순수한 불륜’이란 판타지를 그렸다면, ‘내 남자의 여자’(SBS·2007)는 수위 높은 장면을 쏟아내며 보다 현실적인 불륜 얘기를 그렸다. 폐부를 파고드는 대사와 심리 묘사로 유명한 김수현 작가의 작품이다. 남편과 사별한, 화려한 외모에 거침없는 성격의 전문직(의사) 여성 김희애가 불륜녀로 나왔다. 천사표인 고교 동창(배종옥)의 남편(김상중)을 빼앗는 ‘욕받이’ 캐릭터였지만, 단순한 악녀라기보다는 자기 욕망에 충실하고 솔직한 여자로 그려졌다.
 
예전 같으면 피해자로만 묘사되던 아내도 당당한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김희애는 김상중과 짧은 동거 끝에 혼자가 된다. 가부장적인 그의 태도를 참지 못했다. 불륜 커플이 깨지는 결말이지만 단순한 권선징악 스토리에서 벗어났다. 금기를 깨는 ‘욕망하는 여자’란 전복적인 존재의 등장에 시청자들도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불륜, 여자를 구원하다=‘밀회’(2017)
 
JTBC ‘밀회’. [각 방송사]

JTBC ‘밀회’. [각 방송사]

어린 연인이 황폐한 영혼을 구원한다는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서사였다. 나이 많은 예술가 남성과 젊은 뮤즈의 로맨스라는 전형적 스토리다. ‘밀회’(JTBC·2017)는 이 남녀구도를 바꾸었다. 그것도 40대 기혼여성과 20대 청년이라는 파격적 설정이었다. 최상류층 며느리이자 문화재단에서 일하는 성공한 커리어우먼 김희애는 20살 연하의 가난한 천재 피아니스트(유아인)와 사랑에 빠지며 위선적인 삶을 돌아보고 진짜 자기를 찾는다. ‘밀회’의 정성주 작가·안판석 감독은 앞서 2013년 ‘아내의 자격’(JTBC)에서도 ‘대치동 맘’ 김희애가 동네 학부모 이성재와 사랑에 빠지며 속물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그렸다.
 
여기서 불륜은, 지식인 혹은 중상층의 허위적인 삶을 벗어던지게 하는 주된 동력이다. 부와 계급을 대물리는 수단 외에는 별 의미 없는 결혼제도, 여성의 희생 위에 유지되는 가부장적 가족관계의 민낯을 까발리는 장치이기도 하다. 기혼여성의 불륜이 인간성을 회복하는 구원의 길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탈 결혼 시대의 불륜=‘부부의 세계’(2020)
 
‘부부의 세계’는 얼핏 바람 핀 남편을 나락으로 떨어뜨려 복수하는 ‘아내의 유혹’(2008·SBS)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간다. 복수와 단죄의 불륜 드라마들이 가족과 윤리의 회복을 강조한다면, 이 드라마는 애초부터 가족관계의 유지·복구에 별 관심이 없다. 역시 전문직(의사)인 김희애는 주변 친구들까지 공모한 남편(박해준)의 불륜을 알게 된 순간부터 철저한 응징, ‘내 삶에서 남편만 도려내기’를 목표로 삼는다. 모완일 PD의 말대로 “남편의 불륜에 대처하는 김희애의 자세가 전형적인 한국 여성과 다르다”는 점이 포인트다. 남편 친구와의 의도적인 원나잇, 아들 앞에서 남편의 폭행을 유도하는 등 계산된 행동으로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간다.
 
주변 가정들도 온통 위기다. 겉으론 문제없어 보이지만, 상대의 배신과 거짓말을 모른 척하면서 가까스로 유지되는 위태로운 관계들이다. 결국 불륜 남편은 파국을 맞고, 김희애와 불륜녀 한소희는 각자 자기 인생을 살아간다. 남편의 바람기를 참아온 후배 박선영마저 홀로서기를 택한다. 현실 속 부부관계에 대한 집요한 묘사를 통해 위기를 지나 파탄에 이르는 결혼제도, 흔들리는 가족주의의 단면을 보여준 드라마다.
 
충남대 국문과 윤석진 교수는 “‘부부의 세계’에서 결혼은 사랑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제도에 가깝다. 자아실현과 성취감이 모두 결혼과 연관된 캐릭터를 통해, 삶의 근거를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 것이 얼마나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지 잘 보여줬다”는 평을 내놨다. 남편의 배신에 울부짖는 대신 몸싸움을 불사하는 난타전을 벌이고, 남편에게 돌아오라고 호소하지 않는 김희애는 전례 없는 캐릭터였다. 젊은 여성 시청자들은 그런 김희애의 행보에 ‘사이다’라며 크게 호응했다.
 
‘정상 가정’을 위해 때론 허울뿐인 남편·아빠도 필요하다는 논리가 이 드라마에서는 맥을 못 췄다. 싱글맘이 됐지만 여전히 젊고 매력적인 한소희가 한 남성의 구애를 거부하는 에필로그는 ‘남자가 (필요) 없는 삶’을 택하는 선언처럼 보였다.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대한 염증, 이혼율의 급증, 탈 결혼·비혼이란 시대적 흐름의 초상이 바로 ‘부부의 세계’다.
 
독보적 연기력과 아우라…김희애의 명품연기
“김희애가 아니었더라면 완벽한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갈고 닦았던 전문직 여성이 뿜어내는 내면의 폭풍을 농밀하게 공감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시청자들이 후덜덜한 피로감을 느낄 만큼 격렬한 감정이입이 일어나는 것은 김희애의 독보적 연기력과 아우라 때문이다.” ‘부부의 세계’ 김희애의 연기에 대한 평론가 황진미의 평이다. 그의 말대로 김희애 없는 ‘부부의 세계’란 상상하기 힘들다. 때론 막장 같은 상황에 설득력과 깊이를 더했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 ‘아내의 자격’ ‘밀회’에 이어 ‘부부의 세계’까지 김희애표 명품 불륜 드라마 리스트도 추가됐다.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혜안을 거듭 인정받은 셈이다. 여느 여배우들과 달리 제 나잇대에 맞는 연기를 펼치는 데 두려움이 없는 김희애는 나이 들어도 여전히 매력적이고 주체적인 이미지를 쌓는 데 성공했다. 변함없는 미모와 고급스러운 패션 감각으로 중년 여성의 워너비 스타로 불리기도 한다.
 
영화 쪽에서는 여성주의 계열의 작은 영화들에 출연하는 남다른 행보를 보여왔다. 일본군 위안부 법정 투쟁(관부 재판)을 그린 실화영화 ‘허스토리’, 성 정체성을 속이고 살아온 중년 여성이 딸과 함께 첫사랑을 찾아가는 ‘윤희에게’ 등에서 화장기를 지운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젊은 여성 관객들의 열혈 팬덤을 이끄는 중년 여배우 그룹의 선두주자다.
 
양성희 논설위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