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론] 맥주 한 잔 값 지출도 엄격한 미국 싱크탱크들

중앙일보 2020.05.21 00:26 종합 33면 지면보기
우정엽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

우정엽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전 이사장을 둘러싼 기부금 논란이 한창이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미국의 기부 문화가 떠올랐다. 세계 최강이라 여겨지는 미국은 다른 국가들이 갖지 못한 것들을 많이 갖고 있다. 그중에서 특징적인 것이 미국의 싱크탱크다. 싱크탱크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정책 생태계는 미국만의 독특한 시스템이다. 미국의 싱크탱크가 미국에만 존재하는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기부로 운영되는 독특한 방식 때문이다.
 

기부로 운영되는 비정부단체들
목적 맞게 쓰는지 투명하게 알려

물론 한국에도 싱크탱크들이 있다. 국방연구원·통일연구원 등 정부가 운영하는 국책연구원은 정부가 만든 싱크탱크다. 필자가 근무하는 세종연구소와 아산정책연구원 등은 민간이 만든 싱크탱크다. 민간 싱크탱크의 운영방식은 국책연구원과 다르다. 자체적으로 조성된 운영기금과 주요 기부자의 기부로 운영된다.
 
미국의 경우 많은 싱크탱크들이 그야말로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운영기금을 조성한다. 물론 싱크탱크가 설립될 때에는 독지가의 큰 기부가 있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각자 운영기금을 조성하는데 여기에 미국의 특징이 있다. 바로 다양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재단들이다.
 
미국에 있는 수많은 재단은 설립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사업을 지원한다. 이러한 사업들은 민간 영역, 특히 시장에 맡겨놓았을 때 적절하게 제공되기 어려운 공공재 성격을 가진 사업들을 지원한다.
 
싱크탱크는 공공재 성격을 가진 많은 사업 중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소외 계층, 환경 문제, 문화·예술 등과 관련한 사업들은 산출물의 가치와 사회적 기여는 높지만, 시장에서 적정량을 산출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러한 재단들과 그 목적에 공감하는 많은 시민이 제공하는 지원금에 전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다. 기부와 재단, 공익사업의 연계다.
 
그래서 기부에 의존해야 하는 싱크탱크를 포함한 많은 단체는 기부하는 재단과 개인들에게 그들이 기부한 돈이 얼마나 잘 쓰였는지를 매우 충실하게 보고한다. 기부된 돈이 얼마나 목적에 맞게 잘 쓰였는지를 잘 설득해야 기부가 지속할 것이고, 그래야 기관의 사업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부 없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기부자들에게 충실히 보고하는 것은 단체와 개인이 존속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필자가 초대받아 참석한 한 회의에서 일어난 일이다. 항공권은 가장 싼 항공권을 받았다. 기부로 생존하는 기관들이 비즈니스석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 회의가 끝난 뒤 만찬 중에 주최 측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더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고 싶지만, 지원금 사용 규정상 식사비로 1인당 30달러 (약 3만6000원)를 넘길 수 없어 이 정도 메뉴를 선정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주류는 지원금으로 살 수 없으니 맥주나 와인을 드실 분은 각자 계산하시면 됩니다.”
 
당시 회의 예산이 5000만원 정도였지만 단돈 1달러라도 회계처리에 포함해야 하니 5000원짜리 맥주는 제공할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그 지원금은 기분 내기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모두 동의했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내가 번 돈이 아니라 남이 준 돈을 사용하는 데에는 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사회적 동의가 있다. 이런 사회적 합의와 신뢰가 있으니 기부가 활발히 일어난다. 시장이 제공하기 어려운 여러 공공재를 기부를 통해 만들어 내는 단체들이 활동하게 된다. 기부에 의존하는 비정부단체(NGO)들이 회계에 더 투명하고 더 철저히 공개해야 하는 이유다.
 
기부와 공공재 생산이라는 선순환적 생태계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미국 사회가 그런대로 잘 굴러가는 이유인 것 같아 가끔 부럽기도 하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